저도 행복 정도는 가져 보겠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근사한 장소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행복나무’를 말할 것이다. 슈만과 브람스. 위대한 두 음악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여인, 클라라의 고향 라이프치히. 그녀의 이름을 딴 클라라 파크에는 행복을 기원하는 ‘행복나무’가 있다. 언제, 누가 ‘행복나무’라고 지었는지는 알려진 바 없지만, 지금은 구글 지도에까지 표시되어 있을 정도로 지역에서는 꽤 명소다. 명칭 덕분인지 공원과 나무의 존재는 마치 사랑은 행복의 모태임을 증명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이곳에서만큼은 어떤 주술적인 힘에 의해 행복한 정기가 뿜어져 나올 것 같은 기시감마저 느껴지곤 했다.
나무에는 한국의 서낭당마냥 행복을 기원하는 메시지들이 열매처럼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건강, 사랑, 꿈 등을 기원하는 익숙한 쪽지들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형형색색의 실리콘 재질을 띤 낯선 물건이 눈에 띄었다. ‘아니 대체 이게 뭐지?’ 나뭇가지 곳곳에 이질적으로 매달려 있던 그것은 다름 아닌 공갈젖꼭지였다.
이곳의 부모들은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 처음으로 물었던 공갈젖꼭지를 나무에 매다는 풍습이 있다. 작디작은 생명의 건강과 행복을 기도하면서... 찬란한 햇살과 보드라운 바람에 나부기는 쪽쪽이들을 보면 쪽쪽쪽 뽀뽀를 해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가히 ‘행복나무’로 칭해질만하다. 늘 같은 자리에서 사계절을 오롯이 견뎌내며 사람들의 행복을 지켜주고 있으니까.
‘행복나무(Glücksbaum)’. 독일어로 ‘글뤽(Glück)’은 행복과 행운 두 가지 뜻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 이 단어는 아주 멀리 한국이라는 땅에서 행복을 찾아 기어코 독일까지 온 내게 묻고 있었다. 행운의 네잎클로버를 찾는데 정신이 팔려 정작 곁에 있는 행복은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세잎 클로버의 꽃말이 행복이란 걸 알고는 있는지.
독일에 사는 동안 자주 행복에 대해 고찰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행복한 척 연기를 했던 건지도 모른다. ‘독일에 사는 거 어때?’ 누군가가 물어오면 자동 응답기 마냥 ‘좋다’라고 답했고, 각종 SNS에 행복의 의미를 곧잘 끄적이곤 했다. ‘한국은 바쁨, 독일은 여유’라는 프레임으로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며 진정한 자아를 찾은 것 마냥 알량한 지식인처럼 행동했던 것도 같다. 그것은 모순이고 위선임을 안다. 그럼에도 항변을 하자면 한국을 떠나온 내 선택을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꾸역꾸역 행복을 밀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 살던 나는 행복했었나? 잘 기억이 안 난다.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행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웬만해서는 불행을 잘 느끼지 않는 내 성격 상 아마 한국에 살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잘 살았을 것이다. 그런 내가 독일에서 자주 삶의 수면 위에 행복을 띄웠던 것은 그래야 살 수 있었으니까. 그래야 버틸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삶의 질 이라는 건 지극히 주관적이기에 잣대를 놓고 비교할 수 없겠지만 독일에서의 형편은 부족하지 않았으되 풍요롭지도 않았다. 5만원짜리 크림을 별 부담 없이 사던 서울여자는 10유로짜리 화장품 앞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그 크림이 뭐라고. 삶이 1/5 즈음 쪼그라진 것 같았다. 그것은 ‘전진’은 못할지 언정 ‘정지’도 모자라 ‘후퇴’하고 있다는 패배감이었다. 백화점에서 옷과 화장품을 사고 피부 관리를 받고, 미용실과 네일샵을 가는 생활이 독일에서는 사치를 넘어 아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3년 동안 한 번도 미용실을 못갔다. 가끔은 반짝이는 백화점과 안락함으로 가득했던 피부 관리실이, 아니 더 내밀히 말하자면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대접받는 듯 한 그 느낌이 그리웠다. 여기선 아무리 비싼 곳을 가도, 내가 기꺼이 돈을 지불해도 그저 동양에서 온 외국인이었을 뿐이니까.
아주 사소한 소비의 변화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내가 못나보였지만 인정한다. 지극히 속물적인 인간이라고.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나는 무소유보다는 풀소유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말이 안 되는 논리라는 것을 알지만 정신적으로라도 초라해지지 않기 위해 행복하다는 주술을 자주 걸었다. 그것은 가진 것 없는 내가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 혹은 기백이었다.
‘나는 행복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철학이 일반적인 행복론과 달랐던 것은, 인생의 행복을 즐거움과 화려함에 두는 것은 어리석고 유치하다고 비판했다는 점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나는 매우 어리석고 유치한 사람이지만, 한편으로 훌륭한 사람들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며 수용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다.
행복은 그의 말처럼 겉으로 보이는 것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즐거움과 화려함을 떼 놓고 보니, 모두가 갖고 싶어 하는 ‘행복’을 쟁취하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그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에서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그러나 돈이 없어도 살 수 있는 것이 행복이니까. 행복, 할 만한데.
한 번은 ‘행복나무’ 근처에 있는 ‘B’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을 간 적이 있다. 수많은 이름 중 왜 하필 알파벳 하나로 덩그러니 상호명을 정했을까? 호기심이 일어 계산 할 때 직원에게 물었다.
“B는 어떤 의미 입니까?”
그녀는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띠며 도리어 내게 물었다.
“글쎄요. 어떤 뜻일까요?”
“음...(아무도 기대하지 않을텐데 이런 질문에는 왠지 근사한 대답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낀다. 직업병인가.) 길 이름이 베토벤슈트라세(Beethovenstrasse)라서? (독일에는 괴테슈트라세, 케테콜비츠슈트라세 등 예술가들의 이름을 딴 길이 많다) 아니면 혹시 행복을 뜻하는 라틴어 '베아티투도(Beatitudo)'의 약자일까요?”
“당신은 이미 알고 있군요. 그게 바로 B의 의미에요.”
이 무슨 선문답같은 소리인가. 대체 내가 뭘 안다는 거지? 이럴 땐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하나. 당혹스러웠다. 혹시 그녀는 명상이나 불교 등에 심취해 있는 것은 아닐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내 짧은 독일어로 깊이 있는 대화는 힘들었기에, 그 정도 선에서 대화를 마무리하고 레스토랑을 나왔다.
‘그게 바로 B의 의미다.' 두고두고 곱씹어 보게 만드는 말이었다. 행복이야말로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닐까. 라틴어 베아티투도(beatitudo)는 '베오 beo'라는 동사와 '아티투도 atitudo'라는 명사의 합성어다. '베오'는 '행복하게 하다'라는 의미이고, ‘아티투도'는 '태도나 자세,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즉 '베아티투도'는 '태도나 마음가짐에 따라 행복할 수 있다는 뜻인 셈이다. (라틴어수업』,한동일, 흐름출판사, 2017 참고)
그토록 갈구했던 행복은 내 행동에 달려 있음을, 단어의 탄생 배경이 설명해 주고 있었다. 행복은 추구하는 만큼, 딱 그 만큼만 온다. 같은 의미에서 행복에 집착할수록 행복은 멀어진다는 오래된 주장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행복에 대한 집착이야말로 행복해 질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행복을 쫒는 그 길에서 타인의 삶을 자주 훔쳐봤다. 낯선 독일인들의 얼굴에서 신기루처럼 느껴졌던 행복이 보였다. 일요일 오전, 공원에 의자와 테이블을 가져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아침을 먹는 노부부, 갓난아기와 함께 풀밭위에서 요가 수업을 받는 엄마들,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나들이를 떠나는 가족, 오전에 비키니를 입고 호숫가로 나와 신문을 보는 할머니, 줄타기와 공놀이만으로 즐거운 젊은이들, 호텔 수영장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신나게 물놀이를 아이들…. 별 것 아닌데도 그들의 입에서, 손에서, 다리에서, 온 몸에서 행복이 배시시 흘러 나왔다.
이 사람들을 보면 볼수록 더 행복해 지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다. 나는 행복하고 싶다. 행복에 관해서만큼은 마음껏 향락과 사치를 부리고 싶다. 행복해 지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
이 모든 이야기가 다 개풀 뜯어먹는 소리라며 혹자에게 비난을 들을지라도 행복에 관한 개똥철학을 이어갈 생각이다. 어쨌든 계속 ‘행복’을 곱씹는다면 어떤 방법으로든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독일은 사람을 자주 생각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다. 이래서 철학자들을 많이 배출했나; 무책임한 말 같지만 3개월만 살아보면 이유를 알 것이다.) 나도 이참에 행복나무에 소원지를 걸어 보련다.
저도 행복 정도는 가져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