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란 30년 넘게 모르던 한 남자의 변기를 닦는일

<운명과 분노>_로런 그로프

by 여행생활자KAI

부부싸움 후 답답한 마음을 내뱉을 곳이 없을때면 온갖 집기들을 끄집어내 청소를 했다. 쓸어내고, 닦아내고, 정리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끓어오르는 열을 식혀보려 했다.

그러다 변기를 닦는 순간 구역질이 났다. 돌이켜보니 그는 결혼 후 단 한 번도 화장실 청소를 하지 않았다. 어쩌다 오롯이 나만의 몫이 되었는지 근본적인 원인을 따져보고 싶었지만, 첫 단추가 어떻게 끼워졌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게 내가 이 구역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억울했다. 너무 나갔나 싶긴 하지만, 이렇게 살려고 입시 경쟁 속에 공부하고, 학교 다니고, 취업했나, 회의감이 사무쳤다. 시큼한 화장실 악취가 지난날의 포부와 풋풋했던 꿈들을 몽땅 덮어버렸다. 30년 동안 모르고 살았던 어떤 한 남자의 변기를 닦는 일이 결혼의 실상이었다.



현실을 생각하면 뒤샹의 <샘>은 우아해보이기까지 한다.


“이십삼 년 동안 네가 쓴 변기를 씻은 여자인데,
네가 옆에 없었을 때
그 여자가 살던 삶을 시기하다니.”



로런 그로프의 《운명과 분노》 의 주인공 로토에게 어머니가 건네는 이 말은 결혼 생활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준다. 아내가 23년 동안 변기를 씻었다는 단 한 문장만으로 우리는 이 부부관계가 누구를 중심으로 돌아갔는지 유추해 볼 수 있다.



한때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추천책으로도 유명했던 《운명과 분노》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남편과 아내를 통해 사랑과 결혼을 말한다. 1부는 운명, 남편 로토의 시점에서 2부는 분노, 아내 마틸드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키 크고 잘생긴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로토는 모든 것을 다 갖춘 남자였다. “태어난 순간부터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된다는 말을 들었다.” 일찍 돌아가시긴 했지만 아버지가 남긴 막대한 재산으로 부족할 것 없음을 넘어서 차고 넘치는 삶을 살았다. 로토의 삶은 가끔 멈출지언정 늘 더 좋은 쪽으로 나아갔다. 수려한 외모의 그는 대학에 진학해서도 뭇 여성들을 만났고 연극까지 하면서 학교의 유명인사가 된다.


햄릿을 훌륭히 소화한 그 날, 파티에서 만난 마틸드에게 첫눈에 반한 그는 프러포즈를 한다. 스물두 살 청춘에게 사랑은 가장 빠르고, 찬란한 빛이었고 둘은 만난 지 2주 만에 결혼이란 관문에 입장한다.


로토의 어머니는 출신조차 확실치 않은 마틸드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모든 지원을 끊었다. 막 탄생한 신혼부부는 곧바로 가난에 직면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로토의 연기는 학교 밖에서 인정받지 못했고 조울증까지 얻는다. 마틸드는 로토를 대신해 8년 동안 생계를 책임지며 남편의 재능을 살폈다. 예리한 관찰력으로 남편에게서 글쓰기 능력을 발견한 그녀는 로토가 배우에서 극작가로 거듭날 수 있도록 물심양면 조력을 아끼지 않았다.


시나리오 작가로 대성공을 거둔 이면에는 그가 잠들었을 때 남몰래 작품을 고친 마틸다가 있었다. 그녀는 이 사실을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자신에 대해서도 말을 아꼈다. 마틸드를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남편은 아내가 “세상 온갖 좋은 것을 다 합쳐놓은 여자”인 줄 알았지만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 좋은 여자는 아니었다. 로토는 마틸드의 충격적 과거와 조우하면서 번민하다 죽음을 맞이한다.




2부 분노는 로토를 고뇌에 빠트린 아내의 진실 편이다. 마틸드의 본명은 오렐리였다. 세 살 때 태어난 동생이 분노의 시작이었다. 어린 누나는 모든 관심이 아기에게만 집중되는 것이 싫었다. 질투가 났다. 네 살이 되던 해 오렐리는 계단으로 굴러 떨어지는 동생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아기는 목이 부러졌다. 이 사고로 오렐리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아 파리의 할머니 집으로 보내졌고 조모의 임종 후 미국의 삼촌에게 입양된다. 힘든 나날이 거듭되었다. 낯선 땅에서 홀로 일어서야 했던 그녀는 이름을 마틸드로 바꿨고,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중년 남성의 정부가 된다. 풀 한 포기 없는 사막에서 붙잡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평생 그녀의 발목을 잡는 아킬레스건이 된다. 로토가 충격을 받은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그랬다. 결혼이란 거짓말 혹은 착한 거짓말 투성이었다. 정말 몰라서 속기도 하고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주는 것이 결혼이었다.


마틸드는 댈러웨이 부인처럼 공허하지도, 보바리 부인처럼 뜨겁지도 않았다. 어디에서 냉정하고 어디에서 열정을 유지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하며, 누구에게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초롱꽃처럼 고개를 숙이고 다녔지만 내면에는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그 폭풍을 잠재울 수 있는 이는 얼핏 로토인 것처럼 보였지만 태생적으로 안고 있던 불운을 걷어낼 수는 없었다. 부유한 집안에 재능과 준수함까지 겸비한 로토와 단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하고 삶을 견뎌온 마틸드 사이에는 영원히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부부란 평생을 읽어도 다 읽지 못하는
책과 같았다.


완독할 수 없기에 모든 문맥을 다 파악할 수도 없다. ‘부부’라는 이 어려운 책은 ‘이해’라는 키워드를 통해서만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다. 결혼은 바꿔 말하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의 시간이다. 당신과 내가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는 숨 막히는 사랑이 아닌 당신과 내가 달라서 우린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유연함이 ‘부부’란 독서의 지침서였다.


마틸드와 로토는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연인이 되었고 부부로 반평생을 살았다. 그 동행에는 수많은 배신과 사건들이 있었지만 끝끝내 결혼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녀는 깨끗한 창문을 통해 “지난날의 모든 것이 좋았음을 깨달았다.” 결혼이란 그런 것이다. 좀처럼 가늠할 수 없는 서로의 깊은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딱히 밖으로 나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것. 변기를 닦으며 울화가 치밀다가도 같이 먹을 저녁상을 차리는 것. 세월의 풍화작용에 쓸릴지라도 종국에는 차곡차곡 일상을 쌓아 올리는 것. 너와 내가 둘이 아님을 그렇다고 하나도 아님을 깨닫는 것. 그 어떤 이론으로도 설명하기 힘든 부부라는 공동체가 같이 살아가는 이유다.


https://www.youtube.com/watch?v=nXyU8JWkm84&t=97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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