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방송 작가의 명상 지도사 도전기
거의 모든 방송국에서 밥벌이를 했다. KBS, MBC, SBS 방송 3사부터 EBS를 비롯한 각종 종편, 케이블까지 웬만한 곳은 다 일해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이력 중 많은 이가 독특하게 여기는 곳은 다름아닌 BBS 불교방송이다. 간혹 글로벌한(?) 마인드를 가진 어떤 이는 BBC로 오인하기도 하고 (한번 즈음 일해 보고 싶다.ㅎㅎ) 또 어떤 이는 독실한 불교신자로 오해하지만, 나는 무교다. 종교가 없는 내가 불교방송에서 일을 하게 된 건 오롯이 이 종교가 가진 포용성 때문이었다.
국내에는 여러 종교 방송이 있다. 극동방송, CBS, BBS, BTN 등. 대부분의 방송국들은 정규직부터 프리랜서까지, 무조건 해당 종교의 신도증이 있어야 일을 할 수 있다. 신도증 제출은 필수, 면접은 다음 문제다. 그러나 불교방송은 달랐다. 불교를 믿지 않아도 됐다. 일반 방송국처럼 이력을 보고 채용했다.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한량없는 붓다의 그 가르침 덕분에 나는 불교방송에 몸담게 됐고, 멋모르고 시작한 라디오를 기점으로 15년째 업으로 삼고 있다.
불교방송에서 처음 맡은 프로그램은 <무명(無明)을 밝히고>였다. 피디는 나를 다른 이들에게 “‘무명 작가’에요.” 라고 소개했는데, 불교에 문외한이었던 나는 그 수식어가 생경했고 싫었다. ‘무명(無明)’은 문자 그대로 읽으면 빛이 없다는 뜻이다. 뉘앙스 자체가 달갑지 않았다. 어쩌면 작가란 늘 카메라 뒤에 있는 존재라는, 괜한 자격지심에 거부감이 들었던 것도 같다. 마치 내가 무명(無名)작가임을 상기시키는 것만 같아 울울했다.
‘무명(無明)’은 사전적 의미로 번뇌의 근원,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나는 부정했던 무명(無明)작가가 맞다. 마음은 산란했고 바빴고 동시에 지리멸렬했다. 그 당시 <무명을 밝히고>와 KBS 보도국을 병행했고, 주말에는 EBS 시네마 천국 대본을 썼다.(돌이켜 생각해보면 미친 짓임에 틀림없지만 일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닥치는 대로 일을 하던 시절이었다.)
KBS 보도국, 그곳은 전쟁터였다. 매일 대중을 자극할 아이템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고 제발 쌘 사건이 하나라도 터지길 바라던 나는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반면 <무명을 밝히고>를 할 때면 마음이 편했다. 일명 삼무(三無), 세 가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청률 스트레스가 없었고, 눈에 불을 켜고 촉수를 두고 섭외해야 할 상황이 없었고, 자극적인 소재가 없었다. 무엇보다 타 방송사와 달리 불교방송의 시보는 타종 소리였다. 딩-딩-딩- 저음으로 울려 퍼지는 그 종소리가 그렇게 위무를 줄 수 없었다. 라디오 방송이 끝나는 저녁 6시면 어김없이 딩-딩-딩. 오늘 하루도 수고했다고, 편히 쉬라고 나직이 위로를 건넸다.
나는 그 고요의 종소리를 뒤로 하고 600번 버스에 몸을 실고 마포대교를 건너 여의도로 향했다. 그것은 마치 피안(彼岸)의 세계에서 차안(此岸)의 세계로 역행하는 것과도 같았다.
누구나 무명(無明)에서 명(明)으로 전환할 수 있다.
극명하게 다른 두 일터를 오가며 마음자리에 대해 고민해보게 됐다. 과연 내 마음은 어디에 있을 때 편안한가. 아니 대체 이놈의 마음이란 왜 이리도 정처없이 방황하고 있는걸까. 어깨너머 배운 선, 명상, 화두 같은 단어들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종교를 가지게 됐다는 것은 아니다. 학문적으로 배워보고 싶었다. 이 가르침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부처는 신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부처라는 존재가 아닌 ‘나’라는 존재를 믿어야 한다는 것,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존재 즉 성불할 수 있다는 것, 의지가 있다면 누구나 무명에서 명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무명(無明)에서 명(明)으로 전환하는 첫단계 '명상'
수업 첫날, 선생님께서는 ‘무명(無明)은 곧 에고(Ego)’라고 말씀 하셨다. 불교방송과의 만남도 명상과의 만남도 시작은 역시나 ‘무명(無明)’이었다. 한 번 즈음 바라봐주길 바랐던 어둠에 있는 나, 온갖 번뇌로 난무한 나,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내 마음이 바로 이곳에 서 있다
‘명상(瞑想)’은 어두움으로부터 출발한다. 명상의 ‘명’은 한자로 ‘어두울 명(冥)’ 혹은 ‘감을 명(瞑)’으로 쓰인다. 명(冥)은 ‘日’ 태양을 ‘六’ 6일 동안 ‘冖 ’덮어 씌웠다는 의미라고 한다. 해가 장막에 가리어진 어둑어둑한 시공간 속에서 ‘눈(目)’을 지긋이 감고 더 깊은 어두움(瞑)속으로 들어가 생각(想)에 잠긴다. 명상(瞑想)의 시작이다. 살포시 눈꺼풀을 덮어본다.
하루 세 번 60초
나는 6일이라는 숫자에 착안해 하루에 세 번, 60초 만이라도 눈을 감아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6분을 생각했으나 초보자인 나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1분, 60초 지긋이 눈을 감는다. 어두움 속으로 걸어 들어가본다. 역설적으로 명(明)으로 가려면 무명(無明)에 머물러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깨어있기 위해서 눈을 감아봐야 한다. 눈을 감아야 내가 보인다. 나를 바라본다. 나를 관찰한다. 나를 알아차린다. 명상에서 자주 언급하는 ‘사티(sati, 알아차림)’의 경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잠자는 시간 외 눈을 감는 순간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은 알아차렸다. 단 60초의 순간이 내 마음에 아주 작은 바늘구멍만한 숨통을 틔어줄 수 있음도 알게됐다.
흐흡- 흐-
숨을 내쉬고 들이쉰다.
식식(息息)하는 나를 관찰한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살아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숨을 쉬고 있다, 나는지금 이 순간 평화롭다...
‘쉴 식(息)’, 스스로(自) 마음(心)을 들여다 보는 시간이다.
눈을 감으면 온통 어둠의 장막이지만 불안하지 않다. 오히려 그 무언의 시공간 속에 머물며 나는 상락아정의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편안함을 만났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우리 모두는 어두움 속에서 태어났다. 자궁을 뚫고 빛으로 가득한 세상으로 나온 인간이란 존재는 얼마나 경이로운가. 태초의 우주 역시 무명(無明)으로부터 시작됐다. 만약 우주가 깜깜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별이 반짝반짝 빛난다는 것을 알았을까. 그 반짝임을 쫒아가보기로 했다. 나 스스로 반짝이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그 날을 향해.
딩-딩-딩-
해가 아득하게 어두워지는 시간이 찾아오면, 지긋이 눈을 감는다. 무명(無明)으로 들어간다. 고요의 바다에서 아주 옅은 아지랑이가 일렁인다.
-명상을 만나고보니 무명작가라는 수식어는 참으로 근사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