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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생활자KAI Aug 27. 2019

독일 집에는 맥가이버가 사는 것이 분명하다

혹은 맥가이버가 되도록 만든다.

올여름이 시작되었을 때 내가 제일 먼저 작업한 것은 내 생애 이것을 설치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그것.


방·충·망



웬 방충망이냐고 의아해할지 모르겠지만 독일 집 창문에는 방충망이 없다. 기본적으로 독일 창문의 형태는 마음에 든다. 전체를 열 수도 있고 손잡이 방향을 반만 틀면 윗부분만 열 수 있는데 비가 올 때 윗부분만 열어두고 빗소리를 들을 때가 참 근사하다.

하나의 단점이라고 한다면 한국의 웬만한 아파트 기본 옵션이라고 할 수 있는 방충망이 없다는 점이다. 다른 계절은 상관없지만 여름엔 워낙 파리가 많아서(심지어 독일은 파리도 크다;) 방충망을 달아야 한다. 모든 드럭 스토어에 방충망을 판매하고 있는 걸로 봐서 독일 가정에도 수요는 있는 것 같은데 왜 설치하지 않는지가 의문이다. 이런 내 질문에 다미르는 말했다.


“파리는 들어왔다 나가잖아. 모기만 아니면 돼. 왜 그걸 파리채로 죽여?”


이 무슨 선문답 같은 얘기인 것인가. 나 역시 유구한 화랑의 역사를 지닌 한국인으로서 살생유택(殺生有擇)을 지키며 살아왔거늘.. 음식에 파리가 앉는 건 도무지 용납이 안 됐기에 제대로 마음먹고 설치를 했다. 생각보다 간편했고 마음껏 창문을 열고 살 수 있어서 좋았다.


 

독일에서 판매하는 셀프 방충망 제품과 방충망을 설치한 우리집 창문

어떤이는 미세먼지가 없는 깨끗한 하늘 아래 우아하게 브런치를 먹고 공원을 산책하는 풍경을 상상하며 내게 부러운 시선을 보내지만..산다는건 여행과는 다른 현실적인 문제와 직면하는 일이다. 이 나라는 그야말로 영화 <케스트 어웨이>의 실 생활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독일이라는 척박한 나라에 도착한 편리한 한국에서 온 나는 이 땅에 적응하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다.


아마 이케아 가구 조립은 그 몸부림의 서막이었을 것이다. 이케아에서 산 물건들 중 가장 먼저 한 것은 전등 설치다. 인테리어를 위해서?! 아니다. 독일 집에는 기본적으로


전등이 없다.


기본 형광등이 달려있는 한국과 달리 독일은 이사를 갈 때 전등을 다 떼어가고 또 직접 단다. 사람을 부를 수는 있지만 인건비가 이케아에서 산 조명 값보다 비쌀 것이다. 보통 기본 시간당 30유로, 교통비 별도인데.. 전등 10개 이상인 집에선 300유로 가까이 들기도 한다.


전등뿐만 아니라 집안 대부분의 가구를 이케아에서 주문해서 일일이 조립을 했다. 한국이었다면 여러 가지를 살펴보고 일부는 완제품을 주문했겠지만 얼마나 이곳에 살게 될지도 모르고 가격과 디자인 면에서 이케아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수고로움을 감당해야 한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남편이 잡기에 능한 데다 조립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무난히 넘어갔다.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은 세탁기도 마찬가지인데, 설치가 무료인 한국과 달리 독일은 설치 비용을 따로 받는다. 독일 사람들은 스스로 설치도 한다고 하던데 세탁기 같은 경우 설치비용을 내고 서비스를 받았다. 20유로 정도였고, 구입 시 설치비용 옵션이 따로 있어서 체크를 하면 된다. 이 사실을 모르고 덜컥 세탁기만 주문하면 집 앞에 커다란 세탁기만 덩그러니 놓고 가는 불상사를 만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세탁기의 장소도 중요한 문제다. 한국은 다용도실이라는 신박한 공간을 만들어서 그곳에 세탁기를 비롯해 갖가지 짐들을 넣어놓는다. 독일에도 창고 개념의 켈러(Keller)가 있다. 그런데 지하창고라는 말 그대로 지하에 있고, 시설이 천차만별이다. 지하에 세탁실을 만들어 전 세대의 세탁기를 모아놓고 세탁 및 건조를 하는 건물도 있다. (빨래는 햇볕에 말리는 거 아니었나요?) 사용자 경험담을 들어보니 의외로 잘 마르긴 한단다.


우리 집 켈러는.. 뭐랄까. 나는 그곳의 문을 열자마자 방공호에 들어온 줄 알았다. 어두컴컴하고 시큼한 냄새, 곳곳에 영역을 표시한 거미줄이 나를 반겼다. 여기에 짐을 넣어 두었다가는 멀쩡한 물건도 쓰레기로 변할 것만 같았다.

“음.. 창고가 있긴 한데.. 아마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라고 충고했던 아일랜드에서 온 전세입자의 말은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아마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를 영화화한다면 아주 적합한 장소일 것이다.


다시 세탁기로 돌아와 세탁기에도 옵션이 있다. 세탁기만 사거나 세탁기와 건조기 두 개를 사거나 세탁기+건조기 겸용 제품을 구입하거나이다. 독일은 연중 비가 많이 와서 빨래가 잘 마르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오래전부터 건조기가 보편화되어 있다. 우리 집은 화장실 공간이 작았고 비용을 절감해야 했기 때문에 절충안으로 세탁기+건조기를 구입했다. 확실히 건조기가 있으면 비가 오고 추운 겨울에는 요긴하다. 역시 가전의 보급 형태는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비의 연장선에서 독일 집 관리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곰팡이’다. 비가 많이 오니 자연스럽게 습도가 높고 이는 곰팡이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처음 집을 보러 왔을 때 부동산업자는 곰팡이 관리를 신신당부했다. 환기도 자주 시키고 제습제도 구비해 놓고, 비가 와서 창틀에 물기가 생기면 주기적으로 닦아줘야 한다. 독일 사람들은 곰팡이에 꽤 민감한 편인데 심지어 한 친구의 집주인은 입주하는 날, 습도계를 주며 집안의 습도 유지에 각별히 신경 써 달라고 부탁을 했단다; 집주인이 습도계를 주는 상황은 내게 또 다른 문화충격이었다. 우리 집주인의 무관심함이 이렇게 감사할 줄이야..


곰팡이 다음으론 유럽에서 빠질 수 없는 석회와의 전쟁이 있다. 그나마 라이프치히는 나름 물 부심(?)이 있는 곳이라 다른 지역보다는 석회가 좀 덜하다고는 하지만 석회가 생기긴 한다. 그릇 얼룩은 당연한 것이고, 특히 욕실은 더욱더 강렬하게 분포되어 있다. 그렇다 보니 다양한 석회 제거제를 판매하고 나는 왕성하게 발생하는 이 아이들을 주기적으로 제거해 주어야 한다.


이쯤되면 현기증이 날 수 있다. 그렇지만 더 있다. 다음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 역시 날씨와 관련된 아이템이다.

겨울이면 난방기(하이쭝, Heizung) 관리가 있다. 하이쭝 청소를 해야 하고 여기에 차는 물도 가끔씩 빼줘야 한다. 독일도 신축의 경우 바닥 난방이 깔리는 경우가 있지만 여전히 아닌 곳이 더 많다. 혹독한 겨울이 오면 하이쭝에 오롯이 의지하게 되는데, 바닥 난방만큼 따뜻하지도 않을뿐더러 난방비가 비싸서 펑펑 쓰기도 힘들다. 수면양말은 기본, 옷 세 개 이상은 껴입고 물주머니를 끼고 산다. 당연하게 여겼던 뜨뜻한 바닥장판을 떠올리노라면 구들장을 개발한 우리 선조들은 천재였음을 인정한다.


하이쭝과 청소

 

가사뿐만 아니라 생활 반경 곳곳에 스스로 해야 하는 일들이 도사리고 있다. 이사도 마찬가지인데 한국처럼 포장이사가 잘 되어 있는 곳이 없다. (밖으로 나와 보니 한국은 다 편해 보인다.)  이사 업체를 부르기는 하지만 포장이사가 아닌 포장된 박스를 옮겨준다는 편이 맞겠고, 그렇다 보니 젊은 사람들은 이사를 할 때 대부분 친구들이 다 나서서 도와주는 분위기다. “나 오늘 친구 이사 도와주러 가야 해”라는 말을 꽤 많이 들었다.  아니면 이베이 등을 통해서 일일 인력을 구하기도 한다. 우리야 가난한 유학생이니 당연히 셀프 이사였다. 물론 같은 동네 안에서 한 것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몇 날 며칠 박스를 몇 개씩 날랐고, 무거운 소파를 트램에 실어서 옮긴 것은 웃지 못할 에피소드로 남았다.  

역전의 용사들

이외에도 일일이 다 꼽자면 밤을 새도 모자라겠지만 마지막으로 내게 일상이 된 수고로움 중 하나는 머리 자르기다. 독일의 미용실은 알려져 있다시피 매우 비싸다. 남자 머리는 좀 저렴한 곳에 가면 15~20유로대에 가능한데 여자 헤어컷은 동네 미용실 가격이 강남 살롱과 비슷하다. 그렇다고 결과물이 만족스러운 것도 아니며 샴푸나 드라이 비용은 별도다. 이는 독일뿐만 아니라 호주, 미국 등 다른 외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국의 미용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친구들에게 서울에는 네일도 서비스로 해주는 미용실이 있다고 하니 그들의 얼굴에 “그런 신세계가?”라고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독일이니 나도 내 머리쯤은 집에서 셀프로 자른다. 처음엔 어려웠지만 유튜브를 보고 따라 했더니 나쁘진 않았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나는 왜 지금까지 머리는 무조건 미용실에서 잘라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나 같은 외국인뿐만 아니라 독일 사람들도 미용실을 자주 가지는 않는다. 대부분 염색쯤은 집에서 하고 아이 머리 자르는 것도 엄마가 기본으로 한다.


결국 독일에서는 사람이 해야 하는 것,
즉 인건비는 다 비싸다.


그렇다 보니 스스로 할 수밖에 없다. 같은 맥락에서 노동의 가치를 귀하게 여긴다는 뜻도 된다. 반대로 한국의 편리한 서비스이면엔 그만큼의 노동자들이 감당해야 하는 힘겨움이 있을 것이다. 편리한 서비스와 노동자의 권리가 균형을 이루는 세상은 유토피아일까.


상반된 두 나라를 경험한 나는 처음엔 독일이 인간의 육체와 두뇌가 가동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시험하고 있다는 생각에.. 짜증도 많이 났고 모든 것이 편리한 한국을 갈망했다.


2년 넘게 자급자족 라이프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어나가다 보니 더러 번거롭지만 꽤 괜찮은 성취감과 소소한 기쁨을 맛보기도 한다. 삐뚤빼뚤 서투르지만 내가 한 것에 대한 충만함이 우리 집안 곳곳에 가득해졌다. 나는 충분히 작동할 수 있는 나 스스로가 가진 다양한 능력들을 편리한 서비스라는 명목으로 놀려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언젠가부터 프로 불만러는 프로 긍정러로 변해가고 있었다. 본인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불편한 독일이 한편으로는 재능 발굴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 될 수도 있다. 자족하는 삶에 행복을 느꼈던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경지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마음에는 한 발자국 다가선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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