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감금 수기/당신은 회복하는 사람

by 여행생활자KAI

[하필이면]: 되어 가는 일이 못마땅하여 돌이켜 묻거나 꼭 그래야 하는 이유를 진지하게 캐물을 때 쓰인다.


공교로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하필이면’이란 부사를 사용한다. ‘하필이면 내가 여행할 때 비가 왔다’라든지 ‘하필이면 내가 갔을 때 가게 문이 닫혔다’라든지, ‘하필이면’은 어떤 부정의 뉘앙스를 달고 온다.


코로나로 인해 꼼짝없이 집에 갇혀있어야 하는 시기에 ‘하필이면’ 오른쪽 검지 손가락 마디가 부어올랐다. 집에서 하는 일의 대부분이 핸드폰과 노트북에 끄적거리는 것이었니 부단히도 손을 혹사시켜 얻은,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잔혹한 결과물이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보란 듯이 어제보다 더 봉긋이 부어있는 손가락에 조바심이 일었다. 긴급한 상황 외에는 병원을 이용할 수 없었는데, 내 손가락 상태는 심각한 부상이라고 하기엔 미흡해 보였고 방치해두자니 통증이 심해졌다. 하필이면 이 시국에 손가락이 부을게 뭐람.. 하필이면 왜 코로나가 터져서, 하필이면 왜 독일에 살아서.. 하필이면.. 하필이면.. 하필이면의 하소연이 줄줄이 소시지 마냥 이어지면서 우울의 동굴로 나를 끌어내렸다.


평소에 인지하지 못했을 뿐, 신경을 쓰고 보니 오른쪽 검지는 일상에서 굉장히 자주 사용되는 부위였다. 세수를 할 때, 물건을 집을 때, 요리를 할 때도 검지 손가락이 안 닿는 곳이 없었다. 특히 컴퓨터 자판에서 한글을 칠 때, ㅛ,ㅗ, ㅜ, ㅓ의 자음이 검지를 필요로 했다. 검지를 중지로 대체하여 자판을 두드리며 불편함을 느꼈고 동시에 혹시라도 이 부기가 가라앉지 않을까 봐 걱정이 됐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손가락 상처는 전쟁에서 무기를 잃은 것과도 같았다. 손을 못 쓰게 되었을 때의 공포는 얼핏 상상만 해보아도 몹시 끔찍했다.



“손이란 그런 것이다. 한 사람의 거의 전부다”



한강의 단편집 <노랑무늬영원>에서도 하필이면 손목을 다친 화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녀는 사고로 인해 왼쪽 손목이 망가졌고 그나마 건강했던 오른쪽 손목마저 과도하게 쓰는 바람에 양손을 다 못 쓰는 처지가 된다. 처음에는 그녀를 돌봐주었던 남편과 가족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지쳐가고, 결국 작품 활동뿐만 아니라 일상 자체가 곤두박질한다. 주인공은 나날이 침잠하며 삶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 소설은 손목 질환으로 인해 컴퓨터 대신 손으로 소설을 쓰다가 그마저도 어려워지면서 2년 가까이 글을 쓰지 못했던 작가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급기야 상황이 호전되지 않자 작가는 볼펜을 거꾸로 잡고 자판을 하나하나 두드려서 글을 써 나갔다. 볼펜으로 자판을 눌러써야하는 상황에서 겪었을 망연자실은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오롯이 자신과의 싸움이었으리라 짐작된다.


2012년 <노랑무늬영원>이 나왔을 때, 나는 당시 내가 하던 프로그램을 통해 한강 작가를 만났었다. 화장기 없는 민낯, 정갈한 검은 단발머리, 찬찬한 말투, 무채색의 외투가 작가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글만큼이나 간결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결이 섬세한 사람이라고도 느껴졌다. 얼핏 가녀려 보였지만 분명 단단한 사람이었다.


작가의 글은 낮은 곳에서 시작해 사회 혹은 개인의 어두운 내면을 마주하게 한다. 어느 누구나 안쪽에 하나쯤은 품고 있을 슬픔을 담담히 그려내면서도 결단코 인물들은 절망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지 깊은 슬픔에서 아주 작은 실낱같은 희망을 길어 올린다. 그다음의 행로는 독자에게로 넘겨진다. 그것이 내가 한강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였고, <노랑무늬영원>의 주인공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극복을 할 수 있었던 계기는 우연히 친구의 아이가 기르던 도마뱀을 보게 되면서이다. 손이 잘려나갔지만 다시 차오르는 도마뱀의 새로운 손을 통해 주인공은 눈부신 경이로움을 느낀다.



“내 두 손목에서 돋아난 투명하고 작은 새손,
열 개의 투명한 손가락들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어디까지 왔냐,
어디까지 더 나아갈 수 있을까”



손목은 다쳤지만 감각은 살아있었다. 영원이라고 말할 수 없을지언정 꿈틀거리고는 있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언제고 상처는 아물 것이기 때문이다. 부어오르기를 거듭하던 나의 검지손가락도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나아졌다. 거짓말처럼 근육이 아물어 절망의 정점에서 빛을 비추었다. 하지만 여전히 코로나는 사그라들 줄 몰랐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일상이 아주 사소한 어긋남으로 완전히 망가져 버릴 수 있음을 알았다. 소설 속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실의에 빠졌다. 크게는 전 세계에 이동 제한이 있었고 가깝게는 사랑하는 가족들마저 안심하고 만날 수 없었다. 마치 전 인류가 ‘상처 극복 시험’을 보는 것만 같았다. 역설적이게도 모두가 같은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위로가 되었다.


괜찮다고 다독였다가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답답함에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도 이 상황이 언젠가는 종식되리라는 믿음이, 우리는 분명 나아갈 것이라는 신념이, 꼬꾸라지기 직전의 절망을 일으켜 세웠다.

노랑무늬영원에서, 아이의 미소에서, 점점 더 눈부셔지는 햇살에서, 작은 손가락 상처의 회복에서 나는 희망의 편린들을 보았다. 그 자그마한 것들을 움켜지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 지금까지 삶은 상처와 회복의 순환을 거듭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고통받고, 뭉개지고, 내팽겨 질지라도 기어코 다시 일어설 것임이 확실하다. 그러니 행여나 지금 어떤 막막한 대지에서 홀로 사투를 벌이고 있을지라도, 고통과 상처의 격투 속에서 보란 듯 헤쳐나오는 것, 그것이 바로 ‘당신의 속성’임을 기억했으면 한다. 당신은 회복하는 사람이기에..



<아를의 노란 집>반고흐. 고흐는 이 노란 집에 살았던 시기에 가장 행복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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