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도한 생활>//김애란
초등학교 1학년 봄이었다. 피아노라는 사물이 덜컥 우리 집에 도착했다. 내가 피아노 학원을 다니기 시작하자마자 아빠는 피아노를 사셨다. 우리집 거실 한쪽 벽면을 차지한 고풍스러운 갈색 무늬에 이름 모를 여신이 중앙에 그려진 삼익 피아노는 이제 막 기지개를 편 햇살의 찬사를 받으며 한껏 눈부신 자태를 뽐냈다. 이 피아노는 엄청나게 고고해서 마치 우리 집이 잘사는 중산층으로 상승한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이해가 안가지만 당시 초등학교에서는 집안의 물건들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다. 텔레비전, 세탁기와 같은 생활 필수재가 아닌 가령 피아노처럼 단어만으로도 고급스러움을 물씬 풍기는 물건들은 우리 집이 조금은 여유가 있다고 으시 댈 수 있는 ‘가진 자의 유희’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고 사정이 썩 풍요로웠던 것도 아니다. 지극히 평범하다면 평범한 가정이었다. 다만 성악가가 되고 싶었지만 가난했던 집안 형편 상 음대에 진학하지 못한 아빠는 부단히 나에게 음악 공부를 시키고 싶어 하셨다. 피아노는 아빠의 교육열과 상실한 꿈에 대한 대리만족의 결정체였다. 간혹 술을 드시고 온 날이면 내게 반주를 요청해,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중 <보리수>를 부르곤 하셨다. 나는 아릿하게나마 아빠의 목소리가 처연했다고 기억한다. 그때 못 다한 꿈이 갖는 음색은 씁쓸한 것임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부모님은 내가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바랐지만 나는 그만큼의 재능을 갖지는 못했다. 물론 많은 아이들이 그러했듯 유년시절의 장래희망은 피아니스트였지만 나는 이 길을 통해 밥을 벌어먹고 살 수 없음을 일찍 깨달았다. 하지만 피아노를 손에서 놓은 적은 없었다. 좋아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함께했던 피아노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잠시 작별을 해야 했다. 겨우 나 혼자 누울 수 있는 좁은 자취방에는 피아노가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가끔 고향집에 내려갈 때 손의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피아노를 쳤다. 그렇게 거의 10여년이 지나 비로소 피아노가 들어 갈만한 작은 아파트를(비록 전세이지만)내 힘으로 구했을 때, 나는 피아노를 집에 들여놓았을 때의 아빠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오롯이 나만 있는 내 공간, 내가 일구어 낸 이 장소에 피아노가 자리한 것은 내 서울살이의 상징이었다. 방 두 개짜리 집이 아니라 피아노를 놓을 수 있는 집이란 사실이 나를 흥분케 했다. 이사가 끝나자 마자 건반을 하나하나 눌러봤다. 이내 리듬을 타고 <캐논 변주곡>을 쳐봤다. 꽤 소리가 근사하게 들렸다. 그 멜로디는 그동안 아등바등 이어 온 서울살이가 헛 되이지 않았음을 노래했다. 내 삶이 낮은 ‘도’에서 ‘미’ 정도까지는 올라갔다고 느껴졌다.
우리네 삶의 단계가 낮은 도에서 높은 도로 올라가는 궤적이라면, 김애란 작가는 피아노의 첫 건반, ‘도’에 ‘도도한’이라는 형용사에 절묘하게 붙여, <도도한 생활>이라는 이야기를 읊조렸다.
이 소설에는 만두 가게를 운영하며 피아노를 산 가정이 나온다. 주인공의 엄마는 나를 피아노 교습소에 보내면서 중산층 교육을 꿈꾸었다. 만두를 빚어 근근이 살아가는 형편임에도 딸에게 피아노를 사준 것은 보통의 기준을 따라가고 싶은 (우리 아빠와 마찬가지로) 엄마의 욕망 때문이었다.
주인공은 낮은 도부터 배우기 시작해 어렵사리 높은 ‘도’ 까지 칠 수 있는 법을 배우는데, 그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도레미파솔 다음 ‘라’를 치는 것 이었다. 그것을 통해 음악을 알게 됨과 동시에 삶이란 무엇인지도 깨달았다.
주인공의 삶은 더 이상 높은 음으로 올라가지 않았고, 오히려 파열음을 내면서 추락했다. 대학 입학을 앞둔 어느 날 아버지의 대책 없는 보증으로 엄마의 만두가게는 무너졌고, 나는 언니가 살고 있는 서울의 반지하방으로 피아노와 함께 이사를 간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피아노를 파는 것이 당연했지만 이 가족은 어떻게든 피아노를 가져가려고 한다. 작가는 피아노를 버려야 하는 ‘사정’에 대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 당연한 피아노를 안을 수밖에 없는 ‘심정’에 대해서 쓴다. 그래서 마음이 더 아프고 동시에 더 짙은 공감이 전해져온다. ‘도’의 건반이 낮고 길게 울리듯, 김애란 작가의 시선은 낮은 곳을 향해 더 깊이, 더 멀리 향해 있었다. 남루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결코 비루하지 않은 마음속의 작은 꿈, 성장, 취업, 사랑, 갖가지 시험들, 당시 20대 작가가 쓴 소설에는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그래서 20대의 나는 김애란을 읽고 또 읽었다.
소설 속 엄마가 피아노를 버릴 수 없었던 것은 가족이 처한 가난함을 스스로 인정해 버리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우리에겐 그렇게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것들이 있다. 콧대를 세운다는 뜻의 ‘도도하다’처럼, 없이 살아도 피아노를 사는 콧대, 차압이 들어와도 피아노만은 팔지 않는 콧대, 내 경우에는 당시 아무리 일자리가 없어도 보수 언론사에서는 일하지 않겠다는 콧대가 있었다. 누구에게나 이것만은 최소한 내 자존심의 상한선이라고 긋는 지점이 있다.
그 도도함을 지니고 산다는 것은 때로 치사하고 비루한
삶의 존재 이유 같은 것이기도 하다.
도도한 생활이 힘들어 질 때(솔직히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이러한 상황은 생각보다 자주 찾아옵니다.) 나는 피아노 건반의 ‘도’를 눌러 보곤 했다. 선배 작가로부터 구성이 엉망이라며 호되게 까인 날, 출연자 집 앞에 찾아가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며 출연을 읍소했던 날, 피디와 의견 차이로 대판 싸운 날, 응모한 프로그램에 떨어진 날, 시청률 저하로 부장의 욕바가지를 날로 먹었던 그날에도 책 속의 주인공이 그랬듯, 지금의 나를 긍정하며 지긋이 ‘도’를 울렸다. ‘높은 도’는 청량하고 맑은 음을 뽐내지만 찰나의 아름다움, 딱 그뿐이었다. 반면 ‘낮은 도’는 고요하지만 깊은 울림을 가진, 마치 사람의 발바닥을 닮아있었다.
깊고 낮은 그 소리는 빠르게 걸어 나가는 군중 사이에
조금은 느린 내 발걸음을 나직이 긍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