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전 하이델베르크의 추억 속 두 사람.
그 중 한 사람은 한국관의 사장님이고, 또 한 사람은 한국관 인근에 있는 맥주집 제펠하우스의 피아노 연주자다.
2001년 제펠하우스를 찾았을 때 피아노를 치던 연주자에게 혹시 하는 마음에 "[아리랑]을 아느냐"고 물었다.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익숙한 솜씨로 [아리랑]을 연주한 후 흐뭇한 미소와 함께 생각치도 않은 [아침이슬]을 악보도 없이 연주한다.
한국 유학생이 악보를 건네줬는데 멜로디가 좋아 외우게 됐다고.
그 연주는 내 생애 들어본 최고의 [아침이슬]로 가슴에 남아 있다.
그때의 감동이 아련해 하이델베르크 도착 첫 날, 한국관에서 식사를 마치고 제펠하우스를 찾았다.
17년 세월이 짧은 게 아니라서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추억 속 연주자는 보이지 않는다.
직원에게 "오래 전에 이곳에서 연주하던 사람을 아느냐?" 물으니,
찾는 사람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연주하던 사람이 가까운 옆집으로 갔단다.
가까운 옆집이라면.. 17년 전 같이 들렀던 [RED OX]가 떠오른다.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 무대이기도 하고.
17년 전 그곳에서 연주하던 백발이 성성한 노인에게 [들장미]와 [로렐라이 언덕]을 신청했던 기억이 있다.
오래 전에 연주하던 사람 누굴 얘기한 건지, 또 언제 옆집으로 갔는지도 모른 채,
제펠하우스에서 맥주 한잔 후 다시 레드옥스를 찾으니 영업이 끝나 아쉬움에 발길을 돌렸는데, 그 레드옥스를 다음 날 다시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홀에 꽉 찬 손님들의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나무 벽에 칼로 새긴 낙서는 17년 전 모습 그대로다. 빈티지의 전형.
벽을 향해 있는 연주자의 뒷모습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연주자를 살피니,
언뜻언뜻 고개를 돌리는 순간의 옆 모습과 그레이톤의 머리 색이 17년 전 연주자와 비슷하게 오버랩된다.
한 곡 연주가 끝날 무렵 다가가
2001년에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사진을 보고는
바로 눈이 동그라지며 "It's me~".
그러면서 자기 옆은 누구냐고 되묻는다. "It's me~".
그리고 17년 전 그가 들려줬던 연주곡 이야기를 하니, 더욱 놀라운 표정을 짓고는 바로 아리랑을 연주한다.
내심 아침이슬을 더 듣고 싶었으나, 17년 전 아침이슬 연주가 가장 가슴에 남았다고 얘기했음에도 안 하는 걸보면 악보를 잊은 모양이다.
두 곡 연주를 더 하고 우리 자리로 와서는 자기를 어떻게 찾아왔느냐며 굉장히 반가운 표정으로, 찾아줘서 고맙단다.
그러면서, 17년 전보다 내 얼굴 살이 빠진 거 같다고..
이제 친구 다 됐네.^^
이렇게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이름도 모르는 정겨운 친구가 생겼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나를 보며 건넨 말.
"당신 정말 대단하다. 단순히 여행 자주 다닌다고 이런 일이 생기는 게 아닌데.."
2001년에 이어 17년의 시간이 지난 2018년에도 하이델베르크는 이렇게 나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했다.
기약할 수 없는 언젠가 하이델베르크를 다시 방문하게 된다면, 난 또 한국관과 RED OX를 찾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지금의 자리에서 다들 건강하길 기원한다.
너무나 행복했던 하루, 마음 가득 햇살을 비춰준 하이델베르크.
세월의 흔적으로 세월의 공백을 지워준 이 도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