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기죽지 않고 개념 쪼개기
브런치 작가 활동 계획서에 “디자이너로서의 정체성”이라는 너무도 거창한 표현을 쓰곤 심하게 위축됐다. 정체성에 대해 쓰려면 철학 공부부터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난 당장 디자이너로서 결과물을 만들어내기도 바쁜데…! 그래서 디자이너로서의 정체성을 표현해야 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Who are you, as a designer?
외국계 회사 이직 면접 때 받은 쉬운 단어뿐인 문장인데, 답을 깔끔하게 하지 못했다. 워킹맘이 아닌, 몇 연차+직업으로 표현하는 게 아닌 ‘디자이너’로서의 나…? 디자이너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논의도 변화무쌍하게 진행되는 시대에 정체성이란 거대한 개념까지 섞이니 제대로 한 대 얻어맞았고, 그 질문은 지금까지 나와 함께한다. 대신 좀 더 가볍고, 쉽게.
디자이너의 정체성이라고 했을 때 '취향'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결국 내가 좋아하는 방향,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디자인을 할 테니까. 그래서 좋아 보이는 것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핀터레스트엔 보드만 서른 개가 넘고, 인스타는 계정을 목적별로 세 개로 만들어 그에 맞는 계정을 팔로하고 이미지를 저장한다. 이미지가 아닌 다른 콘텐츠는 노션에 모은다. 강점이 “수집”이라 그런지 수집을 참 많이 하고,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해석한 내용을 sns에 올리다 보니 본의 아니게 헤비업로더가 됐다.
ENFJ 크리에이터인 이은재 PD가 본인이 나온 영상만 다시 본다는 말을 했을 때 크게 공감했다. 난 쉬는 시간에 내가 썼던 글, 올린 사진만 찾아본다. 그럴 때 내가 좋아하는 것, 표현하는 것에 일정한 패턴이 있는 걸 발견한다. 동시에 취향을 드러내다 보니 주변에서도 나를 오랜 시간 지켜본 친구들은 내가 무엇을 좋아할지 쉽게 짐작하고 그 짐작은 높은 확률로 적중한다. 이렇게 좋아하는 것을 모으고 드러내다 보면 내 취향을 알게 되고 정체성이 좀 더 뚜렷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쥐가 먹을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땅굴에 모아둔 씨앗에서 나무가 자란다는 표현을 좋아한다. 나의 '좋아요' 아카이브에서 정체성의 나무가 자라나길.
yunfa 씨는 본인의 디자인을 설명하다가 막히면
'잘 모르겠다'라고 하는 버릇이 있는데,
생각을 왜 그렇게 했는지
다른 사람들이 알아야 도움 되는 정보를 줄 수 있어.
지난 학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교수님께 들은 가장 기억에 남고 도움이 되었던 피드백이다. 내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하다가 이렇게 그린 이유가 '그냥'일 때 뒷심이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다른 누가 시켜서도 아닌, '내가' 주제를 정하고 결과물을 내는 작업인데 A를 A처럼 표현한 이유를 내가 아니면 누가 알겠는가?! 그 후로 의식적으로 "모르겠습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기 시작했다. 대체어로 "사실 '그냥' 했는데, 더 생각해보겠다"를 정하니 피드백이 훨씬 풍성해졌다. 비슷한 접근법을 이용한 다른 디자이너나 작가를 소개받거나, 디자인을 더 나아지게 하는 방향을 안내받았다.
취향 발견을 위해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혹은 '이상한 것'을 수집할 때 내 반응이나 판단에 대한 근거를 붙이는 습관을 들이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보이는지, 왜 그렇게 느끼는지 생각한 것을 글로 남기니 더 자세히, 그리고 집중해서 경험하게 됐다. 이 습관을 유지하기 위해 답사 사진과 글을 업로드하는 계정을 만들었다. 계정을 운영한 지 한 달 정도 되었을까, 동료들과 전시를 보러 갔다. 동료들과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해석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나'라는 무언가가 싹트고 있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