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아이 곁에 있을 수 없었던 사람

보육교사의 하루는 늘 동시에 흘러간다

by ItMiRi

적응기간에 친해진 엄마들은

동네 친구를 얻은 듯했다.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자기들끼리 모여 시간을 보내다가

하원 시간에 맞춰 또 함께 움직였다.


그렇게 어른들 사이의 친밀감은

가끔 어떤 일을

더 쉽게 넘기게 만들었다.


자기 아이가 다쳐 오고

작은 상처가 남아도

“아이들끼리 놀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라는 말로 넘어가곤 했다.


하지만 상처가 반복되자

그 말은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았다.


누군가는 답을 듣고 싶어 했고,

누군가는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 질문은 결국

교실 한가운데 서 있는

나에게로 돌아왔다.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자꾸 물리고 맞을 동안

선생님은 뭘 하고 계셨어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그 장면을 ‘놓친’ 사람이 아니라

매 순간을 ‘붙잡고 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세 살 반 교실에서는

사고가 한 번에 하나씩 오지 않는다.

한쪽에서는 장난감을 뺏겨 울고,

한쪽에서는 의자를 타고 올라가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기저귀를 갈아야 하고,


그 사이 누군가는

갑자기 친구에게 달려든다.

방금까지 보고 있다가도

잠깐 고개를 돌린 찰나,

아이들의 몸은 순식간에 부딪히고

이빨과 손이 먼저 나간다.


그 찰나가 지나고 나면

내 손은 누군가를 안고,

내 눈은 또 다른 누군가를 찾고,

내 귀는 울음소리를 따라 움직인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어어!!!” 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 소리에

내가 먼저 놀라는 날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늘 같았다.


“어머니, 정말 죄송해요.

제가 조금 더 세세히 봤어야 했는데…”


그 말은 변명이 아니라

그 교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문장이었다.


아이들의 안전을 지키고 싶을수록

내 몸은 늘

한 사람분이 모자랐다.


그래서 하루는

늘 동시에 흘러갔다.

한 아이를 안고 있으면

다른 아이의 이름을 불러야 했고,

한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면

또 다른 아이의 울음이 시작됐다.


누군가를 지켜보고 있으면

그 사이 누군가는

잠깐 혼자가 되었다.


그 잠깐이

사고가 되는 순간이었다.


보육교사는

아이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들 사이를 ‘오가는’ 사람이었다.


붙잡고, 달리고, 막고, 안고, 설명하며

하루를 쪼개 쓰는 사람.


그런데 교실 밖에서는

그 동시다발의 시간이

잘 보이지 않는다.


보였던 건 결과뿐이다.

물린 자국, 긁힌 자국, 멍 하나.


그리고 그 결과 앞에서

누군가는 답을 원한다.


그 답은 늘

한 문장으로 수렴된다.


왜 막지 못했는지,

왜 그 순간

거기 없었는지.


하지만 교실 안에서의 ‘왜’는

대개 이런 뜻이었다.


그 순간,

나는 이미

다른 아이의

위험을 막고 있었다는 뜻.


그래서 나는 오늘도

모든 아이 곁에

있었던 것처럼 말해야 했고,


동시에

모든 아이 곁에

있을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교실 안에서의 하루와

교실 밖에서 상상하는 하루는

생각보다 많이 달랐다.


부모의 시간은

내 아이 하나를 중심으로 흐르지만,


교사의 시간은

몇 명의 아이를

동시에 품고 흘러간다.


부모가 보는 장면은

하원 후의 상처 하나지만,


교사가 겪은 장면은

그 상처가 생기기 전까지의

수십 개의 찰나다.


그 찰나들 속에는

울음을 달래던 손도 있었고,

넘어질 뻔한 아이를 붙잡던 몸도 있었고,

위험을 막기 위해

고개를 돌려야 했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대개

설명할 틈을 얻지 못한다.


상처 앞에서

교사의 하루는 늘

한 문장으로 요약되기 때문이다.



“그때,

왜 거기 없었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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