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에서 일하는 마음

PART 1.울음 앞에서, 문 앞에서

by ItMiRi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조카가 울고 있었다.

나는 옆반 담임이었다.

조카의 담임도 아닌데 발이 먼저 멈췄다.


영아반 아이들의 울음은 비슷해 보여도 가까운 사람은 안다.

배고픈 울음, 졸린 울음, 무서운 울음.


그리고 ‘이건 우리 조카다’ 싶은, 그 아이만의 리듬.

그 순간 나는 교사라서 반응한 것이 아니라,

고모라서 반응했다.


그날 나는 문 앞에서 몇 번이나 망설였다.
들어가면 안 되는 이유가 더 많다는 걸 알면서도 울음이 자꾸 등을 밀었다.


결국 문을 열었을 때,

조카는 담임 선생님 품에서 몸을 뒤로 젖히며 울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는 순간 조카가 고개를 홱 돌렸고,

손을 내 쪽으로 뻗었다.


아프게 예뻤고, 동시에 위험하게 달콤한 장면이었다.


담임 선생님은 다정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의 경계는 분명했다.

여기는 이 반의 공간이고,

지금 이 아이를 책임지는 사람은 자신이라는 뜻.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현장에서는 그런 신호가 또렷하게 전해진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닫았다.


내 반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마주했지만,

마음은 한동안 조카 반 앞에 남아 있었다.


예전에는 “우리 애 담임이면 좋겠다”는 말을 들으면 그저 고맙기만 했다.

누군가의 신뢰를 받는다는 기분이 들었고,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안심이 된다는 사실도 싫지 않았다.

그런데 조카가 내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뒤로는 그 말이 조금 다르게 들렸다.


그 말에는 신뢰만 담겨 있지 않았다.

내 불안을 네가 조금 덜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함께 들어 있었다.


부모의 불안은 당연하다.

특히 아직 말을 하지 못하는 영아라면 더 그렇다.


하지만 교사 입장에서 그 기대는 때로 무겁다.


아이는 어린이집에서만 자라지 않는다.

식습관과 수면, 생활 리듬은 가정과 함께 만들어진다.


교사는 그 결과를 매일 마주하고 기록하며 보호자와 나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아이의 하루만이 아니라 부모의 마음까지 함께 떠안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가족의 아이가 같은 어린이집에 있을 때 그 감각은 더 선명해진다.


교사로서 봐야 할 것과 가족으로서 감싸고 싶은 것이 자꾸 겹친다.


이해하는 마음은 커지는데, 그렇다고 기준까지 느슨해질 수는 없다.


그 마음은 낮잠 시간에도 비슷하게 나를 붙들었다.


복도는 조용했고, 문틈으로는 간간이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영아반의 잠투정은 낯설지 않다.

졸리지만 잠들지 못해 울고, 누군가의 품이 필요해서 더 크게 운다.

그런데도 어떤 울음은 유난히 귀에 걸린다.

내게는 조카의 울음이 그랬다.


나는 지나가던 걸음을 잠시 늦췄다.

문 안을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담임이 아닌 내가 자꾸 반 안을 살피는 것 자체가

이미 선을 넘는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만 울음이 조금씩 높아졌다 낮아지는 리듬을 들으며,

저 아이가 지금 어떤 얼굴로 울고 있을지 상상했다.


그리고 마침 내가 그 앞을 지날 때,

담임 선생님이 조카를 안아 올렸다.


그 장면은 짧았다.


아주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원래 안아줄 타이밍이 그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영아반에서는 울음이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안을 수 없는 때도 있다.


다른 아이들을 재우고 있거나,

순서를 조절해야 하거나,

한 아이에게만 바로 반응할 수 없는 상황도 많다.


나도 교사이니 그런 사정을 안다.


그런데도 마음은 너무 빨리 한쪽으로 기울었다.


내가 지나가니까 안아준 걸까.

그 생각은 거의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떠오르자마자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 장면의 앞과 뒤를 모두 본 것이 아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그 선생님이 직전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이미 여러 번 달래고 있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내가 본 것은 그저 한 순간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 한 장면에 의미를 붙이고 있었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도, 아이를 돌보는 사람도 안다.
한 장면은 쉽게 진실처럼 보인다.


울고 있는 아이,

늦게 내민 손,

그제야 안아 올리는 품.


그런 장면은 너무 분명해서 설명을 기다리지 않는다.

보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먼저 결론이 나버린다.

나 역시 그랬다.


그때 알았다.

나는 교사이면서도, 조카 앞에서는 너무 쉽게 가족의 눈으로 기울 수 있다는 것을.


다른 아이였다면 ‘상황이 있었겠지’ 하고 지나쳤을 장면을,

조카라는 이유만으로 다르게 보았다.


아마 돌봄의 많은 순간은 정확히 해석할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최선을 다했고, 누군가는 서운함을 느낀다.

같은 장면을 두고도 보는 위치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담임 선생님보다 먼저 내 마음을 돌아보게 된다.


내가 본 것은 사실이었지만,

내가 느낀 것은 해석이었다는 것.

그리고 해석은 언제나 관계를 따라 흔들린다는 것.


그때 배웠다.

울음에 반응하는 건 마음이라 어쩔 수 없지만,

그 마음 때문에 내 자리를 잃지 않는 건 어른의 몫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지금도 문 앞에서 자주 멈춰 선다.

고모로서의 한 발과 교사로서의 한 발 사이에서.


그리고 이제는 안다.
그 멈춤이 외면이 아니라는 것을.


들어가지 않는 쪽을 택하는 일이,

때로는 내가 조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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