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에서 일하는 마음

PART 2. 먹는다는 일, 연락이 닿지 않는 시간

by ItMiRi

아이의 하루를 본다는 건,

때로 그 뒤의 생활까지 함께 마주하는 일이다.


조카는 먹는 일이 늘 어려운 아이였다.

돌이 지나 어린이집에 왔지만,

이유식을 충분히 거치지 못한 채 일반식으로 넘어온 상태였다.


씹는 연습이 충분하지 않았고,

그 어려움은 식사 시간마다 드러났다.


입에 넣고 오래 머금고 있거나,

몇 번 씹는 시늉만 하다가 결국 뱉어내는 날이 많았다.


한 숟갈 먹이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영아반에서 식사는 단순히 끼니를 때우는 시간이 아니다.

발달을 확인하는 시간이자, 안전을 세심하게 살펴야 하는 시간이다.

잘 먹는지, 얼마나 씹는지, 삼키는 데 어려움은 없는지.


식사 시간에는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드러난다.


그래서 동료 교사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씹는 게 아직 어려운 것 같아요.”
“먹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요.”
“입에 오래 물고 있어서 조금 걱정돼요.”


실제 관찰이었고,

교사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이야기였다.

나 역시 내 반 아이들에게 같은 말을 해왔고,

보호자와 나눠야 할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 말을 듣고 있으면 마음 한쪽이 자꾸 뜨거워졌다.

아이에 대한 관찰이,

어느새 내 가족에 대한 평가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안다.

이건 아이의 현재 상태에 대한 말이다.
누군가를 탓하는 말이 아니라,

도움이 더 필요하다는 뜻일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자꾸 설명하고 싶어졌다.

집에서도 애쓰고 있다고,

사정이 있었다고,

이게 단순히 무심해서 생긴 일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 말을 보태는 순간,

오히려 더 많은 것이 드러날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 설명은 교사로서 필요한 말이 아니라,

가족으로서 하고 싶은 말에 가까웠다.


그래서 나는 자주 침묵했다.


동료들은 일상적인 관찰을 말하고 있었고,

나는 그 말 앞에서 혼자 다른 층위의 감정을 겪고 있었다.


사실은 아무도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나만 먼저 민망해지는 기분.


돌봄의 현장에는 그런 순간이 있다.

누군가는 필요한 사실을 말하고,

누군가는 그 사실 바깥의 의미까지 듣는다.

그 차이는 대개 관계에서 생긴다.


내 아이일 때,

내 가족일 때,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일 때
객관적인 말은 자꾸만 개인적인 문장으로 들린다.


그 민망함은 등·하원 시간에 더 선명해졌다.


“선생님, 보호자 연락이 안 돼요.”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나는 늘 두 사람으로 갈라졌다.


등·하원 시간은 짧지만 예민한 시간이다.

아이를 맡기고 데려가는 순간은 하루의 경계이기도 하다.


어린이집에서의 시간과 가정의 시간이 맞닿는 자리,

교사의 책임과 보호자의 책임이 서로 인계되는 자리.


특히 차량을 타는 날이면 보호자와 연락이 바로 닿아야 했다.

인계는 대충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조카의 경우, 그 긴장이 몇 번 실제가 되었다.


올케는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 영향은 인계의 순간마다 드러나곤 했다.

연락이 바로 닿아야 하는 시간에 전화를 받지

못하는 날이 있었고,

메시지를 남겨도 답이 늦는 날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전화는 내게 왔다.


교사인 나는 상황의 위험도를 먼저 계산했고,

고모인 나는 핸드폰부터 찾았다.


내 잘못이 아닌데도 목소리가 작아졌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인데도 손이 바빠졌다.


올케에게 전화하고,

다시 전화하고,

메시지를 보내고,

다른 방법을 찾았다.


어떤 날은 결국 올케가 다시 어린이집으로 오기도 했다.


일은 해결되지만,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누구도 크게 말하지 않는데,

모두가 알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도 연락이 바로 닿지 않았다는 것.
오늘도 인계가 매끄럽지 않았다는 것.


그 ‘알게 되는 일’이 내게는 가장 어려웠다.


그건 부끄러움이면서도, 방어하고 싶은 마음이었고
동시에 누군가 대신 사과하고 싶어지는 감정에 가까웠다.

교사로서 나는 안다.
연락 두절은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일이다.

아이를 안전하게 인계하는 일은 어떤 사정보다 우선이다.


하지만 나는 동시에 그 사정을 알고 있었다.
밤낮이 뒤바뀐 생활,

제때 깨어 있기 어려운 리듬,

반복되는 피로.


이해는 기준을 없애주지 못하고,
기준은 이해를 덜 아프게 만들어주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점점 알게 됐다.

식사도, 인계도 결국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이는 어린이집에서만 자라지 않는다.

교사는 아이의 하루를 보지만,

그 하루 뒤에는 늘 보호자의 생활이 함께 드러난다.


그리고 그 아이가 내 가족일 때,
나는 그 드러남을 남들보다 더 선명하게 겪게 된다.

어떤 부끄러움은 실제 잘못 보다 관계 때문에 더 커진다.


이해는 남고, 원칙도 남는다.
그 사이에서 나는 자주 두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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