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liam Stoner
앞에서 '시선으로부터'에서 언급한 '한국인이 좋아하는 책 best 5'에 유일하게 있던 외국서적이었다. 이 책은 미국 작가인 존 윌리엄스 (John Willianms) 1965년에 발표한 장편소설이다. 50여 년 정도 독자들의 이목을 받지 못했다가 2000년대 들어서면서 다시 작가들이나 칼럼니스트들에 의해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2011년에는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유럽에 소개가 되면서 이 책이 유럽에서 주목을 받게 된다. 2013년에는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독일등에서 베스트셀러로 등극하였다. 그 여파를 타고 미국에서도 재조명되고, 이 책에 대한 인지도가 상승하였다. 이 책에 대한 논의도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걸 확인하였는데 미국 독자들 사이에 호 불호가 강한 작품인 것 같다.
윌리엄 스토너 (William Stoner)는 19세기말에 미주리의 가난한 농부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농경학을 공부하고자 미주리 주립대학에 진학하였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영문학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고 농부가 아닌 영문 학자로서의 삶을 살기로 한다. 그는 아름다운 중산층 가정의 에디쓰( Edith)를 만나 결혼한다. 하지만 그녀는 중산층이 중요시하는 그들만의 격식을 차릴 수 있는 여유가 없는 스토너에 실망하게 되고 둘의 관계는 매우 차갑게 변해간다. 학교 내에서도 교수 간의 정치 싸움에서도 원치 않게 휘말리게 되면서 그는 어느 순간 가족과 동료들로부터 고립되어 살아간다. 서로 간에 소통이 이루어지는 진정한 사랑이라 믿었던 캐써린(Katherine)과의 사랑은 실패로 끝난다. 세계대전과 대공황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점점 자신의 세계로 더욱더 침잠한다. 오직 문학과 가르침에 대한 애정, 그리고 자신의 연구를 책을 내고자 하는 바람으로 진정한 고독에 대응한다. 암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그는 대단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일생을 바친 자신의 연구처럼 마지막까지 자기 자신으로 살고자 한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삶을 통해 증명하고자 했던 그 무언가였기에. 자신의 일생을 통해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듯 말이다. 많은 평론가들이 이 책을 '실패한 자의 성공담'아라 평하였다.
이 책의 시작은 스토너에 대한 소개로 시작한다. 스토너에 대하여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사람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중략)... 스토너의 동료 중에도 그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즉 그는 존재감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이러한 스토너에 대해 작가는 그의 심리와 내면의 상황을 세밀하게 서술하면서 그 특별하지 않은 한 남자의 인생이 얼마나 진실한지 그려낸다. 스토너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읽으면서 본인이 전혀 경험하지 않았던, 문학의 세계에 빠져들 때의 그 순수한 모습을 매우 섬세하면서 강렬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러한 스토너의 순수성은 그가 세상일에, 예를 들면 학내 정치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독자들은 스토너가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독자인 나의 삶과 비슷하니까.
그러한 스토너가 자신의 인생을 대하는 태도는 관조적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망상적으로나 반대로, 절망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한다. 싸우지 않고 있는 상황을 수용하고 그 상황에서 자신이 허락하는 정도만 행동을 취한다. 자신을 차갑게 대하는 아내 에디쓰와 관계에서도 그녀에게 따지거나 달래려고 하지 않는다. 그녀가 스토너가 쓰던 서재를 자신의 공간으로 만들어 버리면, 그는 다른 곳에 가서 책을 읽는다. 어찌 보면 무기력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면 단단한 나무 같아 보일 수도 있다. 어찌해도 무너지지 않는. 그는 외부의 충격을 흡수할 뿐 방황하거나 그로 인해 자신을 망가트리지는 않는다. 그건 학문이라는, 자신이 믿고 기댈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마지막까지 놓지 못했던 '그의 책'은 우리 모두가 마지막까지 양보 못하는 한 인간으로서 자존심과 같다. 독자들은 어느새 스토너에서 자신을 보기 시작한다.
미국인들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는 위대한 미국소설(GAN: Great American Novel)이라는 개념이 있다. 보통 주인공은 특별한 능력을 가졌고, 그들은 극적으로 성공하지만 그들은 결국 몰락한다. 하지만 그 몰락조차 화려하다.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는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 ' 가 대표적이다. 영화로도 여러 번 만들어진 것을 보면 그들의 선호도를 알 수 있다. 개츠비는 성공하고 열정적인 사람이다. 그 파국조차 강렬하다.* 하지만 그것은 개츠비의 외부에서 보았을 때이다. 그 내부의 허무함은 그지없다.
이에 비해 스토너는 소박하고 고독한 생을 살아간다. 이러한 평범한 일생에도 빛나는 순간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라는 것, 혼자서 내 삶의 길을 묵묵히 걸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끝나는 지점에 나만의 삶의 비밀을 알아버린 자만이 성취한 그 비범한 그 무엇이 있음을 작가는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그 평범한 삶을 지탱해 준 근원이었다는 것을 통찰하게 해 준다. 그리고 독자들은 자신의 일생이 스토너와 다르지 않음을 보게 된다. 우리 모두 힘들고 외롭지만 나만의 삶의 비밀을 간직하고 꿈꾸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 책이 50년 동안 잊히고 있다가 프랑스의 작가, 안나 가발다, 에 의해 번역되고, 유럽에 알려지고 짧은 기간 내에 베스트셀러의 대열에 올랐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마치 우리가 프랑스 영화/유럽 영화와 미국 영화를 볼 때 그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다른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조용하게 심리묘사를 중심으로 담담하게 스토리를 이끌어내는 유럽의 영화는 스토너의 세계와 많이 닮았다. 사건 중심이고 업 다운이 심한 많은 미국 영화의 소재는 결코 아니다. 스토너를 영화화하려고 시도를 하였지만 무산된 것도 결국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대부분의 평론가들처럼 스토너를 실패한 사람이라고 칭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의 열정의 대상은 지식과 사랑이었다. 그는 하고 싶은 문학으로 일을 하였고 자신의 책을 발간하였다. '지식'에 관한 한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였다. 후자가 그를 차가운 공간에 홀로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대로 받아들였다. 보통 사람들의 삶이 이러하지 않은가? 성공의 반대말은 실패가 아닐 것이다. 아마 포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 Tim Kreider (2013) The Greatest American Novel You’ve Never Heard Of, The New Yoker, Oct. 20, 2013 (https://www.newyorker.com/books/page-turner/the-greatest-american-novel-youve-never-heard-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