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운드어바웃에서

우리는 살면서 몇 번의 roundabout을 만나게 될까?


roundabout

a circuitous or indirect road

= traffic circle, rotary

= 회전교차로 (일명 '로터리')


시드니 교외 켈리빌에 잠시 머물게 될 기회가 생겼다. (켈리빌의 위치가 궁금하면 여기를 클릭!)


시드니 교외. 즉 도시 근교. 땅덩어리가 큰 만큼 도시와 도시 근교의 모습들이 상상 이상으로 차이가 많이 난다. 쉽게 말하면, 도시는 상가나 편의시설, 공공기관들이 밀집되어 있어 접근성이 훨씬 좋고, 근교는 그 반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도시 중심보다 시드니 근교에 살며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근교는 주거 지역이 많다. 그런데 한국처럼 눈 앞에 편의점이 있고 몇 걸음만 떼면 카페가 있는 사이즈가 아니다 보니, 별다른 활동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게 영 불편한 거다. 어디든 걸어서 갈 생각을 하면 막막해진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건, 먹거리를 마련할 마트와 작업을 할 수 있는 도서관.


운이 좋다면 걸어서 갈만한 거리에 마트와 도서관이 있는 행운이 임할 순 있으나, 우리에게 그런 은혜는 주어지지 않았다. 삼 주간 머물 집을 확인하고 돌아오는 그 길, 퇴약볕 밑에서 한 시간에 한 대씩 온다는 마을버스를 기다리며 "어쩌다가 나는 켈리빌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곳에 가게 되는 거지?"라는 말을 자꾸 되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붕만 있다면 어디서든 잘 수 있어.'의 마인드로 지내는 우리는 지붕뿐만 아니라, 그에 더해 침대,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샤워와 넓은 부엌, 마우스 커서가 보이는 스마트 티비,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무나 사랑스러운 강아지 람보, 토비와 함께 할 수 있어 참 기뻤더랬다.


참고로 우리가 머문 방식은 일명 '하우스 시팅 house-sitting', 하우스시팅은 집주인이 여행이나 일정으로 집을 비운 동안, 그 집에 있는 반려동물들을 돌보고 집도 관리해주는 방식을 말한다. 우리는 '하우스시터 housesitter.


그런데, 두둥!


이런 인심 좋은 집주인을 봤나!!


하우스 시팅이 시작되는 날, "장 보거나 가까운 거리 다닐 때 써요." 라며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키를 건네주는 거다! 그렇다, 차 키! 생면부지의 우리를 어찌 믿고 흔쾌히 본인의 차를 내줄 수 있는지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고맙다며 덤덤하게 차 키를 건네받았지만, 속으로는 얼싸안고 춤이라도 추고픈 심정이었지.


아이고, 살려줘서 고마워요.


정녕 이 곳에서 나는 대중교통(이라고 쓰고 '대중이 아니라 서민을 위한 최소한의 교통'이라고 읽는다.)으로 생활을 해나갈 수 있을지 막막했던 우리에게 빛으로 다가온 차. 우리는 코체 coche(스페인어로 차)라는 이름도 지어주며, 코체에게 의지하는 삼 주를 보냈다.


아쉽게도 코체의 뒷태 사진 밖에 남지 않았다.



오늘의 대화에 대한 배경 설명이 길었네.


그렇게 코체와 함께 도서관과 마트를 다니고, 가끔 멀리 나가기도 했다. 집주인은 가까운 거리를 다니라 이야기했지만, '가까운 거리'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굉장히 자의적이었다는 걸 고백해본다. 그렇게 코체를 타고 다니며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된 점.



호주는 roundabout(라운드어바웃, 회전교차로)의 나라다!


도심에서 멀어질수록 신호등보다는 라운드어바웃이 많아진다. 보행자보다 차량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원활한 흐름을 위해서 배치한 듯한 라운드어바웃, 한국말로 굳이 번역하자면 회전교차로. 회전교차로에 진입을 하고 거기서 가고 싶은 방향으로 빠지는 구조이다 보니, 내비게이션 안내도 몇 차선에서 좌회전, 우회전하라 알려주는 게 아니라 교차로를 돌면서 몇 번째 출구로 나가라고 안내해준다.


동네 아담한 회전교차로


조금 더 규모있는 라운드어바웃


라운드어바웃이 있기에, 길을 잘못 들었어도 다음 라운드어바웃을 만나면 다시 돌아올 수가 있다. 가끔 그냥 한 20km 직진만 하면 되는 도로를 타게 되면, 속도를 줄여야 하는 라운드어바웃이 영 귀찮기도 하다. 또 어느 방향으로 빠져야 하는지 헷갈려서 길을 잘못 들기도 한다. (내비게이션이 함께 하더라도 헷갈릴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매력적인 라운드어바웃에 대해 자주 얘기하게 된 우리.


"라운드어바웃, 매력적이지 않아? 길을 잘못 들어도 언젠가 라운드어바웃이 또 나올 것 같잖아."


"맞아. 라운드어바웃, 근데 이거 꼭 지금의 우리 같지 않아? 뭔가 돌고는 있지만 멈춰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느 길로 가야 할지 헷갈릴 때가 있어. 우리한테는 내비게이션이 없잖아. 그렇지만 한없이 돌 수만은 없고, 어느 길로 빠져야 하는지 선택을 하는 순간이 오게 되지."


"자의든 타의든 선택을 해야 할 거야. 스스로 길을 선택해서 가기도 하지만, 다른 차들이 마냥 기다리진 않을 거잖아. 이 라운드어바웃을 계속 빙빙 돌기만 하면, 빵빵 거리고 신고도 들어올지 몰라. 그냥 다른 운전자들이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워서 어디론가 빠지고 싶을 거야."


"맞아. 누군가의 시선만으로도 우리는 부담스러워서 어떤 선택들을 하게 되기도 하잖아. 사회적 압력이 있을 수도 있고, 집안에서 들리는 소리들도 있고, '이 나이면 이 정도는 해야지.' 하는 암묵적인 역할이나 기대도 있을 거고."


"그래도 말이지. 작은 동네에 있는 라운드어바웃을 지날 때면 마음이 한결 편해. 비록 많은 라운드어바웃을 지나더라도, 결국 큰 도로에서 만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더라고. 매일 매일의 작은 선택들이 어느 방향으로 살게 될지 결정하는 것 같지 않아?"


"응. 동네 교차로는 작고 또 많아서 길을 잘못 들어도 다시 돌아오기 쉽긴 하지. 그런데 어떤 라운드어바웃은 다시 돌아오기가 아득한 그런 선택지도 많다? 우리 고속도로 들어갈 때 봐봐. 한 번 잘못하면 꼼짝없이 한 두 시간을 달려야 하잖아. 그럴 땐 정신 바짝 차려야 하지. 여기는 도로가 한없이 이어져서 30 시간씩 그냥 쭉 달릴 수도 있어. 땅 덩어리가 크잖아."


"맞아. 그렇지만 고속도로라도 몇 시간이 걸려서 다시 길을 찾아갈 수 있지만, 우리네 인생에서라면 얘기가 달라질 것 같아. 중요한 선택을 하고 나서 그 길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 줄지 모르지. 그 길을 달리다 보면, 다시 돌아가고 싶더라도 온 길이 있어 돌아가지 못할지도 몰라. 아니면 새로운 풍경에 흥분하며 전혀 상상하지 못한 길로 들어가겠지."


"그래... 지금 우리가 돌고 있는 라운드어바웃은 각자 인생에서 얼마나 큰 녀석일까? 언젠가는 어느 길로라도 나가야 하는데 그게 언제쯤이려나?"


신나게 이야기를 하다가 순간 각자의 라운드어바웃, 우리 각자가 돌고 있는 그 교차로의 규모나 무게에 말이 줄었다. 나는 지금 어떤 라운드어바웃을 돌고 있나, 몇 갈래의 선택지가 눈 앞에 있나, 어디로 가고 있는지, 혹은 가고 싶은지 나는 알고 있을까?


그리고 너와 나는 각자의 크고 작은 선택 속에서 어떻게 만났고, 또 만나게 될까?


아니, 만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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