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너머 유실물보관소
언젠가 별 생각없이 너에게 편하게 한다고 하는 말로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 너가 제일 지저분한 것 같아." 라는 말을 하고 말았다. '하고 말았다'라고 쓰는 건, 무심코 뱉고 나서도 '이건 좀 심할 수도 있겠다.'라는 자성이 0.1초만에 따라 왔기 때문이다.
Messy
1. 지저분한, 엉망인
2. 지저분하게 만드는
3. 엉망인, 골치 아픈
messy 하다고 말하는 건, '지저분하다'는 사전적 직역보단 내겐 '잘 어지르는' 혹은 '정리정돈이 쉽지 않은' 정도의 개인적인 해석이 담긴 단어여서 편히 말했는데 상처가 되었나보다. 나쁜 의도는 없었다고 생각하지만, 입장바꿔 생각해보니 듣기에 따라 상처가 될 수 있는 말. 자기가 messy 하긴 하지만 그래도 맘 상한다는 답이 온 걸 보니 말이다.
어떤 단어로 널 표현해야 할까?
- 옷은 매일 같이 갈아입고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으니 청결하지만, 양말을 짝짝이로 신거나 뒤집어 신어도 개의치 않는너.
- 매일 같이 나에게 지갑이며, 핸드폰이며, 충전기를 찾는 너
- 빵봉지를 묶는 그 철사심 같은 걸 매번 바닥에 흘려놓고 대충 비닐로 묶어두는 너 (매일 아침 주워 다시 묶어두는 나)
'덤벙거리는' 혹은 '신경쓰지 않는', '무심한', 좋은 단어가 생각나진 않지만 너는 그런 사람이고, 그게 나는 싫지 않다. 나 역시 덤벙거리기 일쑤여서 항상 물건을 잘 잃어버리고, 어지럽히기 대장이었으니깐. 6년 넘게 일했던 직장에서 가장 더럽고 지저분한(이건 더럽고dirty, 지저분한messy 이 맞다) 책상을 꼽으라면 고민없이 내 자리를 택했을 정도로 지저분했으니. 집이라고 깨끗했던 건 아니다. 침대만 깨끗하고 나머지는 폭격 맞은 것처럼 물건들이 제각기 작은 산을 이루었다. 그런 내가 너를 만나 지저분함을 논하다니 맞지 않아.
그런 두 사람이 지내다보니 물건을 잃어버리긴 다반사고, 잃어버린지도 모르게 있다가 상대방이 찾아주곤 하는 에피소드들이 하나, 둘 쌓여갔다.
에피소드 하나. 돈 주고 산 선물을 잃어버리지. 암요.
작년 네 생일에 고심하고 고심해서 산 수제 직조 손수건 (너무 비싼 걸 주면 부담스러울까봐 이쁘고도 부담스럽지않은 면수건을 샀는데, 넌 이거 어디다 쓰는 거냐고 했지.)은 십일 뒤 게스트하우스 퇴실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지. (쓰레기통으로 갔겠지, 아마.) 그리고 목이 아픈 네게 빌려준 내 손수건도 함께 짜이찌엔.
그로부터 8개월 후, 함께 하는 크리스마스에 선물없이 지나가는게 심심하여 네게 꼭 필요한 물통을 사서 건넸는데 역시나 안녕. 그리고는 내 물병을 대신 들고다닌 너는 그것마저 어디론가 보내버렸지. 자기 것만 잃어버리면 괜찮은데, (사실 괜찮지 않다. 내 선물이니.) 굳이 내 물건까지 함께 잃어버리는 건 무슨 특기인가. 지금은 그냥 쥬스 먹다 남은 통을 물통으로 쓰는데 이 녀석은 세 번 집을 옮길 때까지 따라다니더라!
에피소드 둘. 네가 있어 다행이야.
20kg 여행가방에 실과 바늘부터 봉투, 끈, 마스킹테잎까지 별별 잡다한 물건을 다 들고 왔는데 어쩐지 여행 기간 중에 이어폰을 잃어버릴 것 같아 이어폰도 2개나 들고 왔다. 그런데 필요는 내게 있는 게 아니라 네게 있더라. 오는 길에 이어폰을 잃어버렸다고 살면서 백 개도 넘게 잃어버렸다 중얼거리며 처참한 표정을 짓는 네게 이어폰을 건네니 안 그래도 큰 눈이 확 커진다. "이럴 줄 알고 두 개 가져왔어." 라며 이어폰 하나를 건넸다. (그 와중에도 좀 더 성능 좋은 애플 이어폰은 내꺼.) 고마운 표정의 네가 하는 말, "네가 있어 다행이야."
그러나 나 역시도 칠칠 맞기는 똑같다는 사실. 아침 댓바람부터 싸워서는 거의 하루 종일 말도 안하고 있을 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 도서관으로 출근, 점심시간엔 필요한 말만 하며 맛없는 라자냐와 롤을 먹어댔다. 그런데 도서관이 추워서인지 속이 답답해선지 무조건 밖으로 나가 햇볕을 받으며 걸어야겠다는 생각에 아무말 없이 짐을 싸서 마을을 배회했더랬다. 두 시간쯤 지나서일까, 다시 도서관에 가서 작업을 하려는데 어랏 이어폰이 없다. 그 당시에 녹취 푸는 작업을 일거리로 받아 하고 있을 때라 무조건 음성파일을 들으면서 작업해야 하는데, 이어폰이 없으니 그저 당황스러울 뿐. 그 주위를 빙빙 돌며 찾아보고 사서에게 물어봐서 같이 찾아도 이어폰은 행방불명. 길거리에 떨어졌겠거니. 아니면 누군가가 주워갔겠거니 체념한 순간 네가 온다. 어깨 때문에 물리치료사를 만나러 가야 한다는데, 계속 도서관에서 작업할 거냐 묻는다. 조금이라도 더 떨어져있고 싶어서 도서관에 있겠다 하곤, "근데 이어폰 좀 빌려줄 수 있어?" 라고 소심하게 물었더니 내 이어폰은 자기가 갖고 있단다. 두 시간 전에 너한테 갔더니 넌 없고 이어폰만 덩그러니 있어서 이어폰만 납치했다며 말하는 너. "고마워." 라 말하며 속말도 더한다. "네가 있어 다행이야."
하도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어디에 뒀는지 까먹는 일이 매일같이 반복되니 어느새 우리는 잃어버리는 것에 좀 더 초연해지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그렇지만 매력적인)까지 만들어내게 되었다.
"OO이 어딨는지 알아?"
"어딘가에 있을거야. (It should be somewhere...)"
"무지개 너머 어딘가에? (Somewhere over the rainbow???)"
- 우리가 잃어버린 물건들, 애착관계에서 벗어나 존재감을 잃어버린 물건들, 혹은 심술 궃은 요정이 몰래 가져간 것들은 사실 어딘가에, 그것도 Somewhere over the rainbow 에 있는거지. 근데 그게 완전 무지개 너머 어느 어느 마을 정도가 아니라, 무지개가 시작되거나 끝나는 그 지점에 있는거야.
- 정말 잃어버렸지만 세상에서 사라진 게 아니라 어딘가에 모여있는거야. 그 물건들을 다시 찾으려면 무지개가 시작되는 곳을 찾아가야해. 네가 잃어버린 내 생일선물을 찾으려면 거기로 가야해. 거기에 가면 네가 잃어버린 이어폰 100개가 다 있을거야.
- 무지개를 관장하는 사람은 누굴까? 그 사람은 물건을 대신 사용할 수 있을까?
- 나는 살면서 우산 100개쯤 잃어버린 것 같은데, 그 유실물보관소에 가서 다시 찾아오고 싶다.
- 가끔 유실물보관소로 찾아가서 잃어버린 물건들을 쫙 훑어보곤 필요한 것만 그때 그때 뽑아서 쓰고 싶어.
그렇다. 무지개 너머 유실물보관소 얘기에서 길을 잃은lost 사람들까지. 이런 시덥지않은, 그러나 소중한 이야기들을 계속 할 수 있는 네가 좋다. 칠칠 맞아도 좋다. 유실물보관소에 그대 지분이 많아도 괜찮다.
덧말. 언젠가 시간이 지나 무지개가 시작되는 그 희미한 지점에 있는 유실물보관소에 관한 이야기를 동화로 혹은 그림책으로 써보고 싶다. 하도 물건을 많이 잃어버려서 '도대체 나는 왜 이 모양이지?' 생각하는 나같은 사람이나, 이제 많은 것을 흘리고, 잃어버리고 다녀 칠칠 맞다는 소리를 듣게 될 많은 어린 친구들을 위해. 사실은 다 어딘가에 보관되고 있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