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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연니버스(연상호 + 유니버스)의 궤는 디스토피아가 아니다

by 김안녕



2021년 하반기 넷플릭스 작품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오징어 게임>의 열기가 채 식지 않았는데, <지옥>이라는 뜨거운 작품이 전 세계를 달구고 있다. 개인적으로 <오징어 게임>에 대한 재미는 사실 크게 느끼지 못했었는데, <지옥>은 달랐다. 정말 너-무 재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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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 한순간 지옥행으로 멱살 잡고 끌고 가는 이야기가 주는 몰입도와 신선한 비주얼도 좋았고. 완급조절이 돋보이는 유아인의 연기, 현실을 고증한 짜증 연기의 대가 박정민, 언제부터 이렇게 잘했는지 모르겠는 원진아, 오랜만에 다시 본 단단한 김현주, 그리고 화살촉 이동욱 역의 김도윤, 말 그대로 미친 연기를 보여준 박정자 역의 김신록 배우까지 빈틈없는 배우들의 앙상블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무엇보다 연상호 감독이 그려가는 '연니버스'를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연니버스 (연상호 + 유니버스)의 궤는 디스토피아가 아니다


연상호 감독이 그리는 세계, 연니버스의 핵심은 일명 'K-좀비'로 일컬어지는 어떤 종류의 괴물 또는 폐허만 남은 디스토피아의 배경이 아니다. 연니버스에서 주목하는 건 언제나 사람이다. 같은 상황 속에서 다른 선택과 다른 행동을 하는 다채로운 인간군상을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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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행>에서는 가족과 사람들을 구하려는 석우(공유)와 상화(마동석), 자신만 살려는 인간의 이기심을 보여주는 용석(김의성)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그려진다. <부산행> 이후 폐허가 된 4년 후를 그린 <반도> 또한 살아남기 위해 이기적으로 탐욕을 추구하는 사람 서대위(구교환), 황중사(김민재)와 끝까지 인간애를 잃지 않는 민정(이정현)과 정석(강동원)이 대치하며 긴장감을 자아낸다.


이는 <지옥>에서도 마찬가지다. 죽음의 고지를 받고 두려움과 분노에 휩싸여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는 정진수(유아인), 그 안에서 인간성과 인간다운 삶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민혜진(김현주),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고 싶은 배영재(박정민) 등 죽음의 사자가 나타난 세상에서 각자가 가진 신념과 생각에 따라 전혀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충돌하는 이야기를 그려낸다.


단순히 나쁜 놈 VS 착한 놈의 구조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렇게 살아온 사람이라면, 해선 안 될 나쁜 선택도 할 수 있는 그런 세상. 그런 고민 자체가 작품 전반에 흐른다. A는 나쁜 캐릭터, B는 좋은 캐릭터의 이분법적인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연니버스의 모든 캐릭터가 빛난다. 일례로 <지옥>에서 큰 위기를 만들어내는 '화살촉' 캐릭터는 신선하고 흥미롭게 그려지며 대중들의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연니버스의 시작은 언제였지?


태초에 <돼지의 왕>과 <사이비>가 있었다. 영화를 꽤나 열심히 공부했던 나에게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과 <사이비>가 준 충격과 재미는 어마어마했다. 그러니까 그때 느꼈던 감정은 이랬다.


뭔데 이렇게 재밌는데? 애니메이션이 뭔데 왜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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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의 왕>은 회사 부도 후 아내를 살해한 '경민'이 15년 만에 중학교 동창 '종석'을 찾아 중학생 시절을 회상하며 시작하는 이야기다. 학교에는 미묘한 계급이 존재했는데 경민과 종석은 낮은 '돼지' 계급으로 상위 '개' 계급 아이들에게 짓밟히며 살아간다. 그때 '돼지'들 중 '개'에게 대항하는 그들의 영웅 같은 친구 '철이'가 등장하고 이들은 힘을 합쳐 반란을 꿈꾼다. 이는 산산조각 나긴 하지만. 한마디로 학교 폭력을 그린 이야기. 애니메이션이라는 특성을 살려 학생들을 실제 돼지와 개의 얼굴로 치환해 보여주기도 하는 <돼지의 왕>은 그 어떤 실사 영화보다 생생하게 인간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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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는 말 그대로 사이비 종교를 그린 작품이다. OCN 드라마 <구해줘>의 원작이기도 하다. 마음 기댈 곳이 필요한 주민들을 거짓 쇼로 사로잡아 돈과 인생을 헌납하게 만드는 장로 '경석'. 이런 속임수에 유일하게 넘어가지 않는 아버지 '민철'은 자신의 딸이 사이비에 사로잡히자 이를 구해내려 필사의 노력을 한다. 결과적으로는.. 모두가 끝까지 가는 혈투 끝에 딸과 아내를 모두 잃어버리지만. 사람들의 일그러진 표정을 어찌나 생동감 있게 그려내는지 함께 보고 있자면 얼굴이 찡그려지기 일쑤였다. <사이비>를 돌아보며 가장 돋보이는 점은 연상호 감독이 줄곧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믿음'에 관한 이야기다. 잘못된 믿음과 올바른 믿음, 자신이 믿는 바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것은 오늘날 <지옥>에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로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지옥>의 재미는?


재밌어! 추천한다. 유아인의 새진리회가 세워지는 1~3화 에피소드는 은근히 참고 보기 어렵다는 리뷰가 많던데 난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언제쯤 저 광기가 모습을 드러낼까, 언제쯤이면 폭발할까 궁금해하며 매회를 지켜봤다. 새진리회가 도래한 이후의 디스토피아를 그린 4~6회의 에피소드는 더욱 파워풀하게 펼쳐진다.


천사라는 이름을 하고 지옥행을 예고하는 기묘한 죽음의 고지

이상한 믿음의 울타리에 편승해 편익을 얻으려는 무리

끝까지 인간애를 잃지 않으려는 정의로운 인물


유난히 상반되는 캐릭터, 상반되는 이념이 충돌하는 <지옥>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고 '너는 어떻게 생각해? 너라면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할까?'하고.


나라면, 내가 유아인이라면, 내가 박정민이라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한 번쯤 해봐도 좋을 흥미로운 질문이 가득한 연상호 감독의 <지옥>행 열차에 아직 탑승 전이시라면, 어서 막차를 타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추천지수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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