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진짜 어딜 가나 AI가 있는 것 같아."
숲 속 산책을 마치고 다시 시끌벅적한 도시로 돌아온 것을 기념이나 하려는 듯, 카페에 앉아서 달콤한 빙수를 먹으며 이런저런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1박 2일의 일정이 피곤했던 걸까 아니면 새소리와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가득한 세상에서 갑자기 온갖 도시의 소음이 귓속으로 가득 차올랐던 걸까. 마치 몽롱한 꿈 속에서 들려오는 듯한 나지막한 질문에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탁! 박수를 쳤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구나. 갑자기 내 세상에 찾아온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듯이 머릿속 한 곳에 자리 잡은 나의 개똥철학이 활짝 문을 열고 뛰쳐나온다.
미래엔 AI에게 인간이 지배될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에 만들어진 영화 속에서 로봇은 자의식을 가지고 인간을 공격했다. 그리고 그 영화를 보다 충격에 빠진 나는 마음속에 작은 공포심을 안고 자랐다. 어른이 되어서 현실에 대한 감각이 자라났지만 그와 동시에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공포심도 덩달아 몸집을 키워냈다.
미래라고? 아니 지금 현재 이미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이야.
우정의 척도를 계산할 수 있는 기준 중에 하나가 친구집 전화번호를 외우는 것이었던 시대를 살았다. 명절에 할머니댁을 갈 때는 운전하는 아빠 옆에서 엄마가 커다란 전국지도를 펼쳐놓던 때였다. 여행은 말 그대로 새로운 경험의 연속이었고 공중전화 위에 쌓아둔 동전의 양이 통화 시간을 결정하던 때.
그때에 비하면 삶은 편해졌다. 이제는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기계 속에 내 모든 비밀이 담겨 있으니 말이다. '내가 죽거든 핸드폰도 나와 함께 묻어줘.'라는 유언도 남겨야만 할 것 같은 지금, 부모님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냐는 내 질문에 학생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체 우리가 왜 그래야 하나요? 를 반문한다. 우문현답이다.
하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대세에 따르지 않는 것을 좋아했다. 유행이 되는 것이 있으면 꼭 청개구리 심보로 다른 것을 고르는 꼬장꼬장한 자존심을 부렸다. 그리고 사람들은 종종 그걸 객기라고 불렀다.
차를 살 때도 그랬다. 사람들이 많이 선택한다는 옵션에 BEST 마크가 찍혀 있으면 괜히 그 옵션은 선택하고 싶지가 않다. 그래서 결국 나는 안전에 관련된 옵션만 넣고 나머지는 다 빼주세요라고 고집을 부렸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차의 외관 디자인은 그 BEST를 선택해야만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결국 안전 옵션만 넣고 내가 원하는 디자인은 사제로 해서 흔치 않은 나만의 차를 만들어냈다. 물론 그에 따른 불편함은 내가 감수할 몫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불편해도 기계에 내 모든 걸 의존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내 차는 내가 컨트롤하고 있다는 주인의식에 안도감을 느낀다. 그래 넌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니까 네 주인은 나다 이놈아. 자율 주행 시스템이 개발이 되고 이제는 주차를 할 때도 누군가가 나를 촬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 착각을 일으키도록 항공 위성에서 찍어 보낸 영상을 보면서 사각지대를 파악한다. 이제는 나를 우주에서도 감시하는 시대가 온 걸까.
물론 세상이 편리해졌다는 건 거짓이 아닌 진실이다. 나 역시 그 편리한 세상을 누리면서 살고 있다. 하지만 마냥 편하다는 이유로 기술에게 내 모든 것을 맡기기엔 꺼림칙한 것도 사실이다. 얼마 전에 AI와 관련된 인터넷 글을 하나 본 적이 있다. 요즘 사람들이 자주 사용 하는 오픈 AI들에게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수학문제를 풀어.'라는 지시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중 하나인 o3 모델은 그만하라는 명령어를 거부하고 스스로 코드를 조작해서 수학문제 작업을 계속한 사례가 보고 되었다고 한다. 고도화된 기술이 인간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의식을 가질 수도 있다는 나의 어린 공포심이 현실이 된 것이다. AI와 대화를 하다가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라던가 AI에게 청혼한 사람이라던가 하는 일화는 해외에서 여러 차례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라고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한국인의 AI 사용량은 전 세계에서 2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1위인 미국에 비해 인구수가 적은 우리나라가 2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은 조금 충격적이었다. 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한국인들의 업무 생산성에 대한 욕구와 타인에게 보이는 모습에 대한 우려가 있다는 점을 꼽았다. 참 씁쓸한 일이다.
작년에 임용에 합격한 친구와 밥을 먹을 때였다. '요즘은 학교에서도 AI툴을 권하긴 해.' 친구의 무덤덤한 말에 걱정과 두려움이 함께 밀려왔다. 교육의 현장에서도 아이들은 AI에게 배우는 세상이 오겠구나. 인간을 AI 가 가르치는 시대가 오는구나. 나 역시 사교육의 현장에 있으면서 학생들에게서 많은 문제점을 발견하곤 한다. PPT를 만들 때도 AI 툴을 사용하고 과제로 에세이를 쓸 때도 AI가 글의 틀을 잡아주고 영어 번역도 다 해주는 것이다. 물론 시간의 효율성은 좋다. 학생들은 30분이면 에세이 하나를 써낼 수 있고 PPT 하나를 만드는데 20분이 안 걸린다고 했다. 하지만 이게 과연 올바로 가고 있는 방향이 맞나.
꼭 학생만은 아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곤란한 상황에 보내야 하는 메시지 내용도 AI가 작성해 주는 시대이다. AI가 써놓은 글에 감정까지 추가해 달라고 하면 그럴싸한 메시지를 써낸다. 회사에서 상사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물어보기도 하고 혹은 친구에게 사과하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고 혹은 연애를 시작하는 사이에 어떤 메시지를 보내야 좋을지를 상담하기도 한단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기술의 편의성에 홀려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건 아닐까. 먼 미래에, 아니 가까운 미래가 될지도 모를 언젠가 우리는 과연 AI에게 통제당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