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정주영 <이 땅에 태어나서>
하룻밤 지났더니 벼락부자가 되었다.
요즘 세간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덜 일하고 더 많이 벌 수 있는지, 소위 불로소득에 관한 것이다. 그중 가장 부러움을 사는 것은 단연 “다이아몬드 수저”라 불리는 이들이다. 부모에게 재산을 물려받아, 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일평생 부유를 누리며 사는 삶. 그 모습에 대중은 열광하고 부러워하는 한편, “흙수저”는 경멸이나 탄식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여기, 수많은 부자를 양성하고 본인도 일가를 이룬, 그러나 노력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은 한국 1세대 “흙수저”의 이야기가 있다. 소학교 출신이자 시골 농사꾼의 아들이 세계적인 대기업을 일군 이야기, 한강의 기적을 한 사람의 삶에서 여실히 보여주는 회고록이다. <이 땅에 태어나서>는 현대 그룹의 창업자 정주영 회장이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담담한 어조로 기록한 생애사다. 한국에서 가장 큰 개천의 용, 정주영 회장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한 때 가난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불편한 것뿐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2021년 한국에서 가난은 부끄러움의 대상이다. 1 분위 가정에서 태어난 것이 죄도 아닌데, 부모의 재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멸시를 당하기 일쑤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출신에 대한 끊임없는 ‘구별 짓기’로 이어져, 자신보다 아래라고 판단되면 갑질을 하고, 본인보다 낫다고 생각되는 상대에게는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실 끊임없는 비교의 결과물로서 우월의식과 열등감은 사실 본질이 같다.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남들을 자신의 잣대로 비교하는 그들에게 어린 정주영은 무시하기 쉬운 시골 촌놈이고 정주영 회장은 레드카펫을 깔고 환대해야 할 우상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보이는 정주영 회장의 면면은, 이와 정반대의 길을 보여준다. 그는 어릴 때 농사일을 하거나 쌀 배달을 할 때도, 그의 출신이나 학력을 부끄러워한 적이 없다. 노동의 존엄과 의미를 부모님을 통해 배워 근면한 삶에 대한 존중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쌀가게 주인의 아들의 방만한 모습을 보는 그의 시선에서, 재력보다 삶의 태도를 중시하는 그의 성향을 알 수 있다. 또한 동경대 출신의 일본 댐 전문가 하시모토 앞에서도, 영국의 롱바톰 회장이나 리바노스 앞에서도, 그는 학력이나 재력에 밀려 주눅 들기보다 대담하게 사업 계획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현대그룹을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으로 만들어 놓은 이후에도, 현장을 방문할 때 그를 위해 레드카펫을 깔아 두거나 중역 전용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그런 의전이 보여주는 차별적인 인식을 오만이라고 부르며 경계했고, 그런 형식이 만들어 낼 비효율과 낭비를 혐오했던 사람이었다. 이로 인해 그의 주변에서 소위 그를 띄워주거나 부하직원을 무시하는 행동을 보여준 사람들은 바라던 인정 대신 면박을 받곤 했다. 그의 이런 평등 관념 덕분에 현대는 중역보다 현장 노동자의 필요를 더 생각하는 방향으로 발전해갈 수 있었다. 도시락을 쌀 수 없는 근로자를 위해 식당에서 식사를 제공하고, 회장의 자동차보다 현장의 덤프트럭이 우선인 노동현장을 만들어낸 것이다. 한편, 한국 최고의 부자였음에도 생활의 장면에서 그는 평범했고, 소박한 것을 추구했다. 근래의 ‘다이아몬드 수저’들보다 훨씬 많은 부와 명예를 쌓았지만, 평생 그의 삶에는 검소가 깃들여 있었다. 그리고 가진 것으로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자랑하는 데 시간을 쏟기보다, 자신의 친구였던 노동자들의 발전을 응원하고 지원하는 데 노력을 다한 사람이었다.
가장 낮은 곳부터 높은 곳까지 경험한 그의 시선에서, 모든 사람은 일관되게 평등한 존재였다. 그 덕분에 그는 적재적소에 잘 맞는 인재를 편견 없이 배치할 수 있었고, 학력으로 멸시하는 시선 가운데서도 자유로운 한편, 현장의 노동자들과도 공감과 우정을 쌓을 수 있었다. 지위 여하와 관계없이 서로를 존중하는 평등 관념이 최고의 성과를 창출해낸다는 것을, 그가 직접 작성한 인력관리 지침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인간은 평등하다는 본인의 신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런 신념만이 위대한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경비원 “갑질”, 진상 고객 이야기 등 수많은 불평등이 자행되고, 결국엔 직장 내 갑질을 금지하는 법까지 만들어진 2021년 대한민국에, 내 옆사람이 하는 일만 다를 뿐 궁극적으로는 동등한 인간이라는, 대한민국 최고 기업의 회장님의 신념이 남다른 울림으로 다가온다.
간혹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임승차를 좋아하는 게으름 뱅이거나, 혹은 불평등이 가득한 세상에서 이상을 부르짖는 순진한 사람일 거라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은 이런 부분에서도 일반적인 예상을 비껴간다. 인간은 똑같이 존엄하다 믿었던 정주영 회장은, 다른 한편으로는 “더 할 수 없는 열심”으로 삶을 가득 채운 지독한 현실주의자였다. 쌀가게에서 배달하는 일을 할 때도, 자동차 정비업을 거쳐 굴지의 대기업을 일으켰을 때도, 그리고 올림픽 조직위에서 활동할 때도,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100% 발휘했던 사람이다. 거기에 조급한 성미까지 더해져 그의 하루하루는 단 한 시간도 빠짐없이 중요하고 긴급한 일로 가득 차 있었다. 평등주의자였지만 동시에 인간의 나약함을 잘 아는 현실주의자였던 그는, 직원들을 인격적으로 무시하진 않았지만 일에 관해서는 굉장히 꼼꼼하고 철두철미하게 챙기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가 스스로에 대해서도 남에 대해서도 가혹하리만큼 열심을 강요했던 배경에는, 돈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깨달음이 자리 잡고 있다. 돈만 좇으려고 했다면 고령교 공사와 같은 막대한 손해가 나는 공사를 마지막까지 열심을 다해 마무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봐도 타산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돈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신뢰였다. 누구보다도 열심을 다해 약속을 지키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훈장이다. 불탄 정비공장을 다시 세울 수 있었던 것도, 현대 건설이 어려웠던 태국 고속도로 완공 이후 동남아 진출에 물꼬가 트였던 것도, 모두 다 믿음을 쌓아 두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에 스스로에 대한 신뢰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를 만나더라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열정으로 설득할 수 있었다. 영국 은행에 차관을 받기 위해 5백 원짜리 지폐를 보여주면서, 한국의 역사와 기술에 대해 설명할 때 그의 모습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두가 무리라고 했던 해외진출 계획을 발표했을 때, 그리고 주베일 산업항에 기자재를 만들어 옮기는 방식을 이야기할 때에도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해 봤어?”라고 물었을 것이다. 사실 누구에게나 해보지 않은 일이 훨씬 더 많다. 그러나 해보지 않은 일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는, 지금까지 해 온 일에 대한 긍지에서 자라난다. 그런 점에서 그의 삶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그것을 성공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궤적을 보여준다. 그리고 결국 성공을 거두었던 도전 경험은, 그다음 도전의 마중물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쌓인 상호 신뢰와 자신감은, 부모가 준 재산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산이 되어주었다. 어떠 상황에서도 현대는 약속을 지킨다는 평판과 함께 엄청난 일감과 프로젝트를 안겨주기도 했고, 새만금 간척 때 사용된 ‘정주영 공법’에서처럼 새로운 방식을 과감하게 실행해볼 수 있는 도전 정신의 바탕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모든 과정에서 한 치의 낭비도 없이 최선을 다하는 것은 기본이다.
요즘 사람들은 불로소득을 찬양한다. 대충 일하면서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어 하고, 일하지 않아도 잘 사는 자산가들을 부러워한다. 이제 열심은 미련한 노동에 불과하며,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자산 소득을 따라가지 못하는 흙수저의 몸부림으로 그려진다. 그런 우리에게 20년 전 쓰인 이 회고록은 경종을 울린다. 그리고 주어진 시간을 빈틈없이 열심히 채우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여 최선을 다해보라고 권유한다. 노력 없이 얻은 돈보다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성과를 줄 수 있을 거라 약속하면서.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은 두렵다. 언제나 위험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일에 온전히 헌신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은 실패했을 때의 위험을 더 키우는 지렛대가 된다. 그러나 도전한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여 성실하고 정직하다는 평판을 얻어낼 수 있다면, 그리고 출신과 편견에서 자유로운 평등 관념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 역시 신뢰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아산 정주영 회장은 제안한다. 그렇게 세태를 거스르고 주어진 한계를 극복하는 또 한 번의 "한강의 기적" 이 이 땅에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그의 마음이 구절마다 느껴지는 책이었다.
사실 개인적으로도 아산 정주영 회장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정부의 도움을 받았으니 온전히 그의 성공이 아닐 것이라는 선입견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 정부의 차관과 도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같은 조건 하에서도 그가 내린 용단과 열심이 아니었다면, 현대 그룹을 이렇게 키울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세습과 재벌에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그와 별개로 모든 창업주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였기에 존경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주영 회장이 살던 시기보다는 어떤 면에서는 더 어렵고 힘든 우리나라지만, 그래도 그의 태도를 본받아 더 큰 기적이 일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