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에 대해서

세월의 흐름과 성숙, 그 사이에서

by 이 지음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일들을 비로소 이해하게 될 때가 있다.


1. 오늘 다녀온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본 글이다

‘엄마가 되고 싶은 욕망’과 ‘예술가로서의 정체성’
나는 이 글을 보고 뭐에 홀린 듯이 다가가 한참을 바라봤다.
몇 달 전부터 꾸준히 소아암 아가들이 있는 쉼터에 다니며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그곳에서 봉사 활동을 하며 처음으로 “아이를 가지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나는 임신이나 육아 같은 것을 인생의 계획표에 넣어본 적이 없다. 아직까지 꿈과 열정, 그리고 패기로 살아가는 20대에게 나는 내 자신이 가장 중요했고 아이가 곧 내 커리어를 망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꾸준히 아가들을 만나며 생각이 바뀌었다.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말이다.
급작스러운 내 사고의 변화는 내 스스로를 당황하게끔 했다. 그러나, 요즘 내 길은 꽤 분명하다. ‘육아’를 하고 싶다는 소망.

2. 결국 ‘이해’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만, 위의 이야기와는 다소 상반된 이야기이다. 나는 ‘나 혼자 시간을 보내는’ 꽤 명확한 루틴이 정해져있다. 가령, 매주 금요일에는 광화문 교보문고에 갔다가 청계천에 있는 카페에 들러 공부를 하고 글을 쓴다던가, 날씨가 벅차게 좋은 날에는 꼭 삼청동을 간다던가와 같은 이야기들 말이다. 요즘은 반경을 조금 달리해 안암에 있는 카페에 가서 공부를 하기도 한다.
지금은 삼청동에 있는 스타벅스에 이 글을 쓴다. 나는 이 루틴이 꽤 마음에 들며, 이 시간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결혼을 하고 싶다, 아이를 가지고 싶다, 라는 생각이 가득했던 요즘, 항상 머릿속에 ‘함께’라는 그림을 가지고 있었는데 동시에 ‘혼자’로 가득 채우는 이 시간들이 얼마나 나를 깊이 있게 만드는지도 깨닫고 있다.

3. ‘이해’에 관한 세 번째 이야기이다. 10년 간 받았던 치료를 종결했다.
치료를 받을 때에는, 병원과 치료의 목적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 중에 한 가지를 꼽으라면, “병원을 다니지 않고, 치료를 받지 않고 어떻게 살 수 있을까?”였다. 통증에 몸부림치던 나는 병원이 없다면, 치료가 없다면, 살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고 매주 병원 가는 날을 애타게 기다렸다.
증상이 나아졌다는 걸 느꼈을 때는 내가 ‘병원을 가고 치료를 받는게 성가시게 느껴졌을 때’였다. 더 이상 아픔은 없었다. 그리고 통증도 없었다. 치료 없으면 죽을 것만 같던 느낌표가 병원을 왜 가야하지? 라는 물음표로 바뀌었다. 의사선생님은 경과를 지켜보고, 치료를 종결시켰다.
더불어 내 이야기의 방향도 달라졌다. 나는 오늘 아침, 평상시에 읽었던 잿빛색깔의 암울한 글이 아닌 사랑에 관한 에세이집을 꺼내들었다. 인간의 심연에 대해 말하던 글과 아픔에 대한 몸부림을 표현하던 모든 몸짓들은 이제 행복을 이야기한다.

이제 나는 아프지 않은 삶에 대해 이해한다.


나의 변화에 대해 생각해본다. 단순히 세월을 따라 나이가 들어가는, 그리하여 누구나 겪는 단순한 세월의 흐름인 것인지, 단단하게 갇혀있던 껍질을 깨고 나아가는 일종의 변태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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