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일기

극과 극 사이에서

by 이 지음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다. 9월부터 극한의 스케줄을 소화했다. 어제 아빠에게 카톡으로 ‘내 생애 가장 열심히 산 순간’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정도로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보냈다. 끝에는 많이 힘들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너무 지쳤다. 어젯밤 11시에 신문사 근무가 끝나자마자 곯아떨어졌고 정말 오랜만에 뒤척이지도 않은 깊은 잠을 잤다.

바깥에는 바람이 제법 차가워졌다. 사람들의 옷자락은 한 뼘 더 길어졌고 버스에는 더 이상 에어컨을 틀지 않았다. 나는 오랜만에 헤드폰을 끼지 않고 길을 걸었다. 원래 음악 듣는 걸 좋아했는데, 근 몇 주간은 음악을 즐기려고 음악을 듣는 게 아니라 텐션을 끌어올리려고 억지로 음악을 들었다. 촬영할 때 감정을 조절하려고, 또는 너무 지쳐서 더 이상 움직이기 싫을 때 억지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피곤해진 귀를 정말 오랜만에 해방시켜 줬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서점으로 향했다. 읽고 싶은 책들이 많았는데 통 서점에 갈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가장 먼저 서점에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제 집안 청소를 하면서 중고서점에 팔 책들을 정리했고 가장 먼저 그 책을 가져다 팔았다. 아쉽게도 그다지 손이 많이 타지 않은 책이라 깨끗했다. 내 것이었지만 정들지 못했던 책들을 보내며, 나는 나의 취향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었다. 책을 팔고는 광화문 교보문고로 향했다. 오늘은 어떤 책을 살지 명확한 생각을 하고 서점에 갔다.

좋아하는 작가님이 쓴 <아오리 아니고 아오모리>라는 책을 가장 먼저 집어 들었다. <아오리 아니고 아오모리>를 쓴 연덕작가님을 처음 만나게 된 건, 내가 일했던 한 스타트업이었다. 한때 커뮤니티 사업을 하는 스타트업에서 매니저로 일한 적이 있었는데 커뮤니티 모임을 이끄는 모임장으로 연덕님을 처음 만났다. 한쪽으로 차분하게 땋은 머리, 연덕님과 딱 어울리는 긴 기장의 치마, 그리고 모임원들의 첫 만남을 위해 꽃집에 들러 여러 송이의 꽃을 사 오신 게 내 기억에 가장 남는 연덕님의 모습 중 하나다. 하필 그날은 내 생일이라 연덕님이 나에게도 꽃을 주셨다. 나는 그 꽃과 함께 찍은 사진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어떤 작품은 막연한 동경심과 경외감을 품게 만드는 작품이 있다. “나도 저런 작품을 만들 거야”라고 시기질투심을 느끼는 것이 아닌, 같은 예술가로서 보아도 그냥 이유 없이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글. 나에게는 연덕님의 글이 내게 딱 그랬다. 처음 연덕님의 작품을 읽게 된 건 <액체 상태의 사랑>이라는 에세이집이었다. 연덕님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셨는데 나는 그 이야기 속에 담긴 다정함과 따스함이 참 좋았다. 글을 읽으면 마치 내가 그 세상에 있는 듯한 섬세한 묘사도 내가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나는 유난히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못했는데 그건 예술가로서 일종의 내 자격지심이기도 했다. 이때까지 연기한 작품들도 죄다 눈물 연기에 아픈 상처를 주로 다루었고, 썼던 글은 죄다 우중충했다. (작년에 희곡을 쓰는 학부 수업에서 정연님의 글 속 인물은 왜 다 죽어요?라는 질문도 받았었다) 그게 내 고유의 색깔이며 예술가로서 팔리는 상품임을 알고 있었기에 자꾸만 심연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도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막연한 욕심이 자꾸만 들었다. 연덕님의 글은 그런 내 갈증을 채워주는 존재였다.
그리고선 시집과 알랭 드 보통의 책 한 권을 샀다.


책을 짊어지고는 어김없이 안암에 있는 한 카페로 와서 글을 쓴다.

숨 쉬듯 흘러가는 편안함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깨닫는 요즘이다. 그러나 이 또한 다 치열했던 순간이 있어서라는 걸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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