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는 나고, 난 매우 한심하군.
2024년 작
그 날은 우리가 처음 헤어진 날이었다. 그러니까, 아주 예전에, 사귄 지 100일 즈음 되었을 때 내가 헤어짐을 고한 걸 제외하면 말이다. 헤어지자는 말은 똑같지만 그때와 지금의 무게는 엄연히 다르다. 7년이라는 세월이 있으니까. 싸우던 도중 그가 헤어지자고 말했고, 나는 너무 놀라서 운전하던 그의 오른손을 붙잡고 그러지 말라고 울면서 붙잡았다. 그러고 그는 내 손을 맞잡았다. 방금 헤어짐을 고했던 그 입이 다시 열리기까지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나와 싸우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이제는 그만두고 싶다, 뭐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을까? 그러면 난 어떻게 하지? 우리 진짜 끝인 건가? 이렇게 갑자기? ……그는 미안하다고 했다. 실수라고, 말이 잘못 나왔다고, 진심이 아니라고. 그리고 나야말로 자기랑 헤어지고 싶어진 게 아니냐고. 방금 헤어지자고 한 사람이 누군데 나보고 뭐라고…? 그렇게 우리 사이에는 헤어짐이 오갔지만 우린 결국 헤어지지 않았다. 그는 실수라고 말했고 나는 그걸 믿고 싶었기 때문에.
사랑을 하면 사람이 바보가 된다더니 그 말이 정말인가 보다. 이전에 나는 그런 변명은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했고 우리 중 한 명이라도 헤어지자고 하면 그건 정말 종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난 그때가 되면 돌아보지 않을 거라고 몇 번이고 다짐했었다. 내가 그에게 먼저 헤어지자고 말하는 걸 수도 없이 상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다. 그걸 내뱉고 난 다음 생길 일을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언제나 목구멍만 간지럽게 만들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건 갈등을 회피하고 싶어 안달이 난 내 불안함을 잠재우는 도구였다. 잠깐의 옅은 상상으로 나를 붙잡아주는. 하지만 틀렸다. 상상을 아무리 해도 그건 현실만 못했다. 나는 그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오 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매달렸으니까. 눈물을 흘리면서 그러지 말라고 했다. 내가 따지던 중이었음에도 그를 힘들게 했다는 생각에 미안하다고 했다. 그가 원하면 얼마든지 애원할 수도 있었고 다시는 그렇게 트집 잡듯 물고 늘어지지 않겠다고 계속 생각했다. 눈 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고 굉장히 두려웠다. 아무런 이의제기 없이 그냥 보내주겠다는 건 헛소리였고, 아무렇지 않을 거라는 건 희망 사항이었다. 그 순간 모든 게 끝이 날 거라는 건 허상이었다.
결국 우리도 여느 커플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지금까지는 다르다고 생각했었지만 틀렸다. 이 싸움이, 이 대화가 끝이 나지 않을 것 같고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했지만 모든 일이 끝난 지금까지도 나로서는 여전히 이해하기가 힘들다. 내가 없으면 살 수가 없으니 죽을 거라며. 내가 삶 그 자체라며. 내가 제일 좋고, 나를 가장 믿고, 나를 가장 사랑한다며. 말을 하는 순간에는 진심이었겠지, 그건 믿는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내가 그런 존재로서 남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분명 내게 과거의 어떤 잘못을 평생 미안해하겠다고 했다. 평생 잘 해주겠다고,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도 했다. 본인이 먼저 내게 헤어지자고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우리가 헤어진다면 내가 헤어지자고 해서라고, 하지만 절대 그렇게 만들지 않을 거라고.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말했다. 지난 7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정말이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했다. 내가 계속 물었으니까, 내가 계속 듣기를 원했으니까. 하지만 그랬던 게 무슨 소용이겠어, 우리도 싸우다가 헤어짐을 고할 수 있는 커플이었던 걸. 그가 한 말은 무너질 수 있는 거였다. 그는 우리의 이별을 어느 정도는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도 그래. 나도 너에게 헤어짐을 고하는 상상을 수도 없이 했어. 하지만 우리의 차이점이라면 나는 안 했지만 그는 결국… 했다는 거다. 후회를 하고 사과를 했지만. 아무튼 그는 했다. 우린 그 점이 달랐다.
돌이킬 수가 없다. 이건 없던 일로 취급하기가 힘들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이것 역시 고작 한 번의 실수라지만, 어떤 실수는 쉽게 용서할 수 있고 어떤 건 선뜻 용서하기 힘든 법이다. 우리는 그동안 수없이 많은 서로의 말실수를 넘어가 주었고 사과와 함께 흘려 보냈다. 하지만 관계를 포기하는 말은 그냥 보내기가 어렵다. 그게 깊게 고민한 거든 실수로 툭 뱉은 거든 자꾸 그 모습이, 말이, 머리를 맴돈다. 좁은 차 안에서 말다툼을 한 우리,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어가며 그에게 따지는 나, 말하는 도중 불쑥 튀어나온 한 마디, 이어지는 내 애원. 그리고 잠시 뒤 그 뒤로 따라붙는 사과와 후회. 그도 울었다. 그는 너무 후회되고 자기도 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으며 너무 속상하다고 했다. 내게 평생 잘해주겠다고.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여전히 나를 원한다고, 헤어지면 죽을 거라고. 나를 떠나고 싶지 않다고 헤어지자고 하지 말라고, 잘못했다고, 평생 미안해하겠다고, 나밖에 없다고. 언제나 했던 입버릇같은 말을 토시 하나 바꾸지 않고 똑같이 다시 했다. 나는 같이 눈물을 몇 방울 흘리면서 서러워하는 그를 달래주었다. 바보같은 영주야. 그동안 생각했던 건 대체 어디로 갔니. 실수든 진짜든 그걸 입 밖으로 꺼낼 정도로 그 순간만큼은 나와 이별하기를 원했다는 건데 이걸 봐주다니 너도 사랑에 눈이 멀긴 멀었구나. 그동안 헤어져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 역시 안 괜찮은 모습을 포장하려는 껍질이었고 허세였구나. 너도 결국 여느 다른 여자들처럼 네 남자의 실수를 덮어두고 외면하려고 하는구나. 그는 방금 관계를 깨려고 했다고. 그런 생각이 벌처럼 머리를 왱왱 돌아다녔다. 그를 얌전히 받아주는 내가 무슨 수녀라도 된 느낌이었다. 용서와 화해가 숙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멍청한 년. 종교도 없으면서.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말실수든 아니든 상관없다고 냉정하게 돌아서서 억지로라도 이별을 밀어붙여야 했던 걸까? 나는 그가 헤어지자고 하자마자 그에게 매달렸기에 내 반응이 조금 달랐다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모르겠다. 집에 와서 물어보니 그러면 자기가 미안하다고 다시 매달렸을 거라면고 말하긴 했지만 지금으로써는 썩 믿음이 가는 얘기는 아니다. 내가 이 질문을 하고 싶은 건 지금의 그가 아니라, 내게 헤어짐을 고했던 몇 시간 전의 그니까. 둘은 분명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이다. 사실, 내가 그렇게 믿고 싶은 거 뿐이겠지만. ……나는 그를 제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아니라는 사실이, 그가 했던 달던 말이 어떨 땐 진심이 아니었을 거라는 사실이, 혹은 그의 마음이 순간이라도 달라졌다는 사실이 너무 매서워서 외면하고 싶다.
아마 나는 그가 냉정하게 다시 한 번 더 헤어지자고 말했더라도 그냥 돌아서진 못했을 거다. 더 처절하게 매달리면서 그러지 말라고 있는 눈물을 죄다 뽑아내 그의 셔츠 소매를 적셨겠지. 그러니까, ‘헤어지자’는 말 끝에 달려있는 이어진 일과 일련의 생각과 거기서 뻗어 나온 충동이 얼마가 되든 간에, 자존심이든 미래든 그건 다 모르겠고 후회하지 않을 선까지 온 힘을 다해 바지 자락을 붙잡고 주저 앉았겠지. 그러니 애초에 내가 했던 모든 생각은 말이 안 되는 거였다. 예방 주사 격도 못 된다. 나는 그를 버릴 수 없고 떠날 수 없고 놓아줄 수 없다. 그 뿐이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실수로라도, 넌 그걸 얘기했잖아. 나는 무서워서 한 번도 하지 못했던 그 말을.
어쩌면 이게 내겐 기회일지도 모른다. 한 사람에게 모든 걸 기대고 있는 이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벗어나서 독립적인 인간이 될 기회가. 나는 대학에 입학했던 21살부터 28살이 될 때까지 모든 시간을 그와 함께 했다. 어른이 되고 얻은 모든 지식과 경험에는 그가 있다. 나는 그에게 기대서 서 있었다. 그러니 그가 언젠간 나를 버리더라도 온전히 혼자 설 수 있게, 갑자기 그가 또 헤어지자고 해도 너무 속상해하지 않을 수 있게, 혼자서라도 다음 세상에 나갈 수 있게…… 그렇게 모든 걸 그에게 위탁하지 않고. 난 늘 사람은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지. 여자는 남자에게는 마냥 기대서서 모든 걸 맡겨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모래성 위에 집을 짓고 자아를 쌓고 있었다. 다 알면서도, 한 번도 그러지 않았고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다는 게…….
바보같을 지도 모르겠다. 고작 한 번의 말실수였던 걸 가지고 너무 과장해서는 울고 불며 오바했던 꼴이. 하지만 어떻게 해, 지금의 난 다른 걸 생각할 수가 없다. 내 사랑은 이따위고 이 사랑을 가르쳐준 건 한 명 뿐이라서. 그가 오냐오냐 내 사랑을 다 받아주는 동안 나는 그를 안았고, 먹었고, 소화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아무리 다짐을 해도 이젠 뭐가 됐든 그를 떠나 생각할 수도 다짐할 수도 헤어지자고 하는 그를 얌전히 놔 줄 자신이 없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도 난 매달릴 거고 앞으로도 매달릴 게 분명하다.
…하지만 넌 할 수 있잖아? 난 생각만 해도 자신이 없는데. 넌 정말 할 수 있는 사람이었잖아. 그리고 이걸 나는 매일 반복하겠지, 이 생각과 저 생각과 모든 생각들을. 그러면서 떨쳐버리지 못해 괴로워하고. 바람피는 거나 한 번 봐준 것 마냥 굴겠지…. 엄연히 다른데도 말이지. 하지만 정말 다른가? 어떤게?
이래서 내가 한때 순간을 믿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던 거다. 미래에 우리는 헤어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 순간만큼은 그가 나를 사랑하는 걸 믿는다고, 그걸 내게 계속 보여달라고 하는 거다. 나는 이제 정말로 오늘만 믿을 거다. 오늘만 내내. 난 네가 어제 보여준 애정은 믿지 않을 거야. 그건 이미 지난 일이 되었고 어제의 너는 없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이래서, 이래서. 사람들이 추억은 힘이 없다고 말하는가 보다. 나는 정말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추억은 현재를 붙잡고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정말 알겠다. 그것도 그럴 게 어쩔 수 없어. 우리는 그날 한 번 헤어진 거나 다름 없으니까. 너는 분명 그 전날에도, 그 전 전날에도 나를 떠날 수 없다고 그건 상상도 하기 싫다고 했었잖아. 그리고 다음 날에 그러려고 했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