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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따가 Mar 18. 2024

집이 좋은 사람 (1)

내 첫 기억은 텔레비전을 올려다보던 기억이다. 우리 집 작은 텔레비전은 어린 나를 위해 준비된 것은 아니었다. 꽤 높은 곳에 올려져 있었는데, 아마 어른 키보다 높은 곳이었지 싶다. 작은 브라운관 안에는 배트맨 애니메이션이 틀어져있었다. 브라운관 속 검은색 망토를 휘날리며 폭력을 휘두르는 배트맨은 미취학 아동에게는 너무 자극적인 영상이었다. 어린 나는 텔레비전을 올려다보느라 목이 너무 아픈데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올려다보았다. 아픔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목 뒤의 뻐근한 통증과 배트맨을 향한 욕망. 내 첫 기억은 그렇게 아픔과 도파민이 뒤얽혀있었다. 


얻고 싶은 것이 있다면 아픔을 참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준 텔레비전은 어릴 적 거쳐갔던 수많은 집들 중 한 곳에 있었을 거다. 온 집안이 반대하는 결혼을 했던 부모님은 십원 한 장 도움 없이 신혼 생활을 시작하셨는데, 엄마 말로는 7년 동안 12번이나 이사를 다녔단다. 나에게 남은 그 시절의 기억은 목이 참 아팠던 그 기억 하나다. 엄마가 힘든 시절 얘기하면서 항상 귀가 닳도록 얘기하는, 이사를 그렇게 많이 다녔다고 하던 그 시절. 그 시절은 나에게는 뒷 목의 뻐근함으로 남아있다. 


나의 두 번째 기억도 집과 함께였다. 이사 가는 트럭 안이었는데 나는 이사 간다는 사실을 알기는 했는지 한 껏 신이 나 있었다. 하지만 너무 흥이 겨워했는지 집 가는 길을 다 참지 못하고 피곤에 지쳐 차 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  내가 태어난 1989년부터 노태우 정부에서는 200만 호 주택 공급 정책을 시작했다. 분당, 일산, 중동, 평촌, 산본 다섯 개의 1기 신도시가 새로 개발되어 첫 공급은 1991년이었고 1997년 입주가 마무리되었으니 내가 유치원을 다닐 나이가 되어서야 산본으로 이사를 간 우리 가족은 1기 신도시의 막차를 탄 모양이다. 


우리 집은 꼭대기 층에서 한 층 아래 19층이었는데, 창 밖을 내다보면 수리산 한쪽 봉우리에 기상 관측소도 보이고 양 옆으로 수리산이 둥글게 둘러져있었다. 동 간 거리도 멀어서 앞 동에 사는 사람을 보려면 망원경이라도 꺼내야 하는 그런 곳이었는데 나는 그렇게 탁 트인 전망보다도 새집 냄새가 좋았다. 화학물질에 대한 위험성도 지금처럼 잘 알려지지 않았고, 베이크아웃이라는 개념도 없는 때라서 지독하게 냄새가 났겠지만, 나는 그 자극적인 냄새가 본드 냄새가 좋았다. 높은 곳에 이성과 함께 올라가면 무서워서 그러는지 좋아서 그러는지 헷갈린다고 하던가. 그 기억 덕분에 나는 지금도 새집 냄새가 나면 괜스레 설레고 그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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