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나는 어떻게 내가 되었나? - 술
그토록 좋아하던 술을 끊었다. 벌써 한 달 넘게 먹지 않는 중이다. 큰 이유는 피부병 때문이다. 어느 날부터 얼굴에 열이 오른 다음 가라앉지 않고, 트러블이 미친 듯이 나며, 심지어는 아프기까지 했다. 초반에는 왠지 이 증상의 원인이 술이라고 의심이 들면서도 정말로 술이라면, 끊어야 되니까 겁이 나서 부정했다. 끊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동안 술과 술자리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살았다. 술을 먹으면 나도 사람들도 직관적으로 행동하는 게 좋았다. 슬프면 슬프다고 말하고, 좋으면 좋다고 말하고,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화가 나면 화를 내는 것. 아마 평소에는 슬퍼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좋아도 유난스럽게 보일까 봐 좋다고 말 못 하고, 힘들어도 괜찮다 말하고, 화나도 참고 사니까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또 얼마나 좋은가. 추운 겨울에 포차에서 따뜻한 국물에 소주 한 잔 마시면 얼마나 좋고, 여름에 야장에서 튀김에 시원한 맥주를 마시면 얼마나 좋고, 가끔씩 좋아하는 사람들과 집에서 각종 치즈에 이름도 모르는 싸구려 와인을 마시면 얼마나 좋은가.
그렇지만 술의 단점이 있다면, 효력의 유통기한이 길지 않다는 것이었다. 술 먹고 나눈 사랑은 다음 날이면 떠나버렸고, 술을 마시면서 다진 우정도 결국 삶에 흐지부지 되기 마련이었다. 오히려 숙취가 길었다. 나날이 숙취를 해결하는 노하우만 늘어가고, 관계는 오히려 텅 빈 관계가 많아졌다. 그러면서, 말하자면 술은 좋고 사람들은 싫어지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니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게 됐다. 정말로 술의 맛이 좋아서 혼술을 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혼술을 했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 술은 무엇보다 시간을 버틸 수 있는 힘이 돼주었다. 퇴근하고 뭐하지, 내일 쉬는데 뭐하지 하는 생각들을 반쯤 접어줬다. 술이나 마시지 뭐, 하고 애들한테 ‘뭐하냐 나 내일 쉬는데 거기 가서 소주나 마실까’ 같은 제안을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또 취하고, 취한 나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 속에서 맴돌다가 어떤 시절이나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짐작해보며 작아졌다가, 굳게 다짐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일 최악이었던 건 늘 후회할 짓을 했다. 그중 제일 후회되는 건, 너무 사랑을 쉽게 했던 것 같다. 기형도 시인의 <그 집 앞>을 빌려서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날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이었네 /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 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 / (…)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대외적으로 피부병을 유일한 이유로 이야기하지만, 사실 술을 끊을 수 있는 이유를 기다려왔던 것 같다. 왜냐면 쉽게 사랑하는 나의 악습관을 버리고 싶었다. 너무 쉽게 흩어질 말들을 하고, 무언갈 약속하고, 시간이 무서워서 술을 사랑하는 식으로 삶에서 도망가려는 나한테 조금 질렸다고 해야 될까. 아직도 내 인생에서 남은 날동안 술을 마시지 않고 살아간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게다가 작가 하고 싶은 사람이 술 못 마시면 어떡하나 싶은 편견 섞인 걱정이 여전히 남아있기도 했는데, 정확하게 생각해보니 작가면 작업하면 되지 술이랑은 무슨 상관인가 싶다. 분명 취하는 게 좋았었는데, 이제는 취해있지 않아서 좋다. 앞서 말했던 술의 힘을 좀 빌려서 슬프면 슬프다고 말하고, 좋으면 좋다고 말하고,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화가 나면 화를 내는 그 행위를 이제는 맨 정신에 할 수 있다. 단단한 자연스러움이 좋다. 이렇게 좋아했던 것 하나가 또 과거로 남겨졌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통과해보며 달라지는 삶의 모양에 적응해본다. 취한 나를 견뎌주었던 지인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이 글도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썼음을 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