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은 Dec 27. 2021

잠과 잠 (Sleeping and Sex)


* 글에서 ‘그’는 특정 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들을 단수인 ‘그’로 지칭합니다. 이유는 그들의 결이 모두 비슷하기 때문이며, 운이 안 좋게 ‘별로인 한 사람’을 만나서 일어난 불행담이 아님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은 보통의 연애를 다루고 있습니다.


-


돌아선 그의 등을 볼 때면 하염없이 울고 싶었다. 초반에 팔베개를 해주던 그는 온데간데없고 피곤하다는 듯 등을 돌려 누웠다. 내가 등을 콕콕 찌르는 장난을 치면 돌아오는 대답은 이랬다. ‘이 자세로 자야 편해서’, ‘내가 원래 이렇게 자서’ 같은 말들. 나는 그럼 그가 초반에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초반’이었기 때문에 해줬던 것들에 대해서 감사를 표해야 할지, 아니면 유지하지 못할 행동을 왜 해서는 날 이렇게 외롭게 만드냐고 화를 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보면 고마워하지도 화를 내지도 못하고 얼떨떨한 표정을 지은 상태로 그 순간이 지나갔다. 그러면 그는 이미 돌아누워있었다. 핸드폰 밝기를 최소로 해놓고 관심도 없는 가십거리들을 읽으며 나도 어서 그처럼 잠이 들기를 바랐다.


연애 패턴도 단순해졌다. 집에서 놀고, 요리를 해주겠다던 그의 요리는 언제쯤 맛볼 수 있을지 미지수였으며, 밤이 되면 섹스를 하고 잠들었다. 혹여 밤에 섹스를 못하면 아침에 했는데 끝나고 나면 바로 어플로 집에 가는 버스나 지하철이 언제 오는지 확인하며 ‘아 집에 언제 가냐’라고 말했다. 옷을 입고 아무렇지 않게 ‘다음 주에 봐’라고 하는 그의 말은 왠지 나에게 ‘다음 주에 하자’라는 말로 들렸다. 감정을 나누는 연애인지, 몸을 나누는 연애인지 헷갈렸다. 왜냐면 나랑 하는 것 중에 선 섹스만이 그가 행복을 느끼는 순간 같아 보였으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사소한 말들이 신경 쓰이고, 답장 속도가 신경 쓰였다. 예전 같지 않은 대답, 처음 같지 않은 태도. 그러나 그는 편하게 잠들었고, 그의 코골이 소리에 나는 좀처럼 잠에 들지 못했다.


-


그와 함께하는 연애 동안 늘 피곤했다. 잠을 편하게 자 본 적이 없었고, 식욕 또한 부진해졌다. 그는 내가 잘 먹지 못하는 게 ‘여자들은 늘 살찔까 봐 조금 먹는다’라고 생각하는 듯했고, 내 음식까지 아주 맛있게 먹어 치웠다. 배가 부른 그는 편히 잤고, 나는 알 수 없는 생각에 잠겨선 그의 몸이 숨을 쉬느라 부풀었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하는 것을 꿈뻑꿈뻑 보다 다시 자리에 누웠다. 물론 편히 잠드는 것은 그날도 포기해야 했다. 한 번은 그가 코를 골기 때문에 내가 잠을 자지 못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와의 연애가 끝나고 코를 골지 않는 사람을 만나도 나는 잠을 자지 못했다. 내가 불행한 애라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예민하고,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잘 자는 것은 평생 이루지 못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내가 잠을 잘 잤던 날이 기억난다. 아침에 그를 보며 ‘이번엔 진짜 사랑인가 보다’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봤는데, 그걸 눈치채진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는 역시였다. 얼마 가지 않아 그는 돌아누웠고, 나와의 데이트에서 그가 준비하는 건 콘돔 밖에 없었으며, 그의 행동에서 실망한 것을 짚어 대화를 하려고 하면 어설프게 행동하며 아이처럼 굴거나 되려 화를 내며 나를 히스테릭한 여자로 몰았다. 그래 그러면 그렇지 뭐. 다시 잠을 자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나와의 관계가 깊어진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연애 초반만큼의 노력을 쏟지 않았는데도 옷도 벗어주고 섹스도 해주니까.


-


그래서 그에게 ‘나를 정말 좋아하냐’고 질문을 수차례 했는데, 대답은 ‘좋으니까 만나지’라는 퉁명스러운 대답이었다. 언제는 그가 한 말에 ‘거짓말’이라고 했더니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내 마음은 이별이라는 지점에 도달해가고 있었다. 연애가 너무 피곤했다. 감정적으로도 피곤했고 육체적으로도 잠을 자지 못해 피곤했다. 응당 여자 친구가 하는 행동들을 흉내 내며 연애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확신 없는 관계를 정리하고 편안하게 자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잘 자고 싶어서 그와 이별을 했다. 그러나 불면은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는 않았다.


곰플레이어로 영화를 보던 중학생 시절, 영화 <연애의 목적>을 본 적이 있다. <작업의 정석>쯤 되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라고 예상을 하고 재생시켰는데, 영화는 첫 대사부터 나를 충격에 빠뜨리더니 시작한 지 30분도 채 안됐을 땐 카섹스 씬이 나왔다. 중학생인 나는 놀라 다급히 영화를 껐다. 그대로 영화는 폴더 속에 봉인되었다. 그러다 그 영화를 완전히 이해하게 된 건 섹스를 경험하고 나서가 아니라, 섹스 후 외로움을 경험했을 때였다. 같이 자도 외로웠던 그런 순간들. 영화 <연애의 목적>에서 불면증이 있다던 홍은 유림의 곁에서만큼은 편하게 잠든다. 보다보다 유림이 묻는다.


유림 “너 불면증 맞아? 무슨 잠을 그렇게 자냐”


홍 “몰라 나는 너만 보면 이상하게 졸립드라 (…) 나 서울에 와서 한 번도 제대로 자 본 적 없거든. 밤에 불을 꺼놓으면 맨날 가위눌리고 악몽 꾸고.. 불을 켜놓으면 누가 창문으로 들여다보는 것 같고 그래서 차라리 잠을 안 자고 버텼어. 근데 이제 푹 잘 수 있으니까 너무 좋아. ”


유림 “어.. 그러니까.. 난 안 좋은데.. 그냥 내 옆에 있으면 잠이 잘 오니까, 날 이용하는 거네”
    
홍 “그런 거지. 넌 그런 존재야.”


-


홍과 자고 싶어서(Sex) 다가갔던 유림, 잘 잘 수 있어서(Sleeping) 유림을 만났던 홍. 연애 그리고 더 나아가서 사랑, 그것은 평생 함께 자는 일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러니 <연애의 목적>에서 홍이 유림에게 수십 번을 망설이다 결국 [잠이 안 와 같이 자고 싶어]라는 메시지를 전송했을 때, 벅차오르는 기분을 느낀 건 아마도 ‘같이 자고 싶어’가 ‘같이 있고 싶어’로 들려서였다. 영화 속 잘 자는 홍을 보며 내가 잠을 잘 잤던 몇몇 날들이 떠올랐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친구들, 가족들과 잤던 날들. 자고 일어나도 나를 어제와 같이 사랑해줄 사람들과 함께였던 날들. 


어쩌면 우리는 불면증이 아니라 결핍을 앓고 있는 게 아닐까. 관계를 시작하고 유지하는데 여러 조건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잠을 잘 잘 수 있는 관계라면… 사랑 아닐까? 보통 잠이 보약이라는데, 오늘은 잠이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잠이 어떤 잠이든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8교시의 비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