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다. 정규 수업이 7교시까지였고, 내 기억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7교시가 끝나면 4시쯤이었던 것 같다. 석식까지는 한두 시간이 뜨는 시간이어서 우리 학교에는 ‘8교시’라는 애매한 시간이 만들어졌다. 8교시는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뉘었다. 수업과 자습. 수업은 신청을 해야 가능했는데, 정규 수업이 아닌 만큼 비용이 들었다. 아이들의 반응 또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뉘었다. 7교시 내내 수업을 들었고, 어차피 학교 선생님한테 듣는 건데 비용을 지불할 만큼의 퀄리티가 아닐 것이니 듣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첫 번째 유형과 정규 수업에서는 분위기나 수업 진도를 위해 이해가 안 돼도 넘어갔던 부분들을 다시 보강할 수 있으니 좋다고 생각하는 두 번째 유형이 있었다. 나는 아무렴 상관이 없었다. 왜냐면 나는 그즈음 공부를 어느 정도 포기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선생님들은 우리들의 선택을 최대한 수업으로 이끌려고 노력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건 우리 담임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하필 그때 운이 좋지 않게 교탁 맨 앞자리였다. 선생님이 면대 면으로 나에게 물었다. 상은 8교시 수업 안 들어? 너 자습해? 선생님이 물었다. 자습할래요. 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왜 자습해 수업 듣지? 선생님이 한 번 더 물었다. 아 저 수업 들을 돈 없어요. 내 말에 선생님이 몸을 숙여 나에게 가깝게 다가와 말했다.
“…상은이 네가 수업을 공짜로 들을 수 있어”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시간이 몇 초 걸렸다. 우리 집의 경제적 기준이 하위에 있다는 말이었다. 순간 나는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모르겠다. 최대한 빨리 표정을 고쳐 웃었던 것 같은데, 나보다 몇 곱절은 더 사셨을 선생님 눈에 그 어린애의 표정이 안 읽혔을 리 없다. 하여튼, 웃으면서 말했다. 아 그래도 수업 듣기 싫어요. 나는 그날 처음으로 교탁 맨 앞자리인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우리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어제와 똑같이 생긴 집이 오늘은 다르게 보였다. 벽지도 누래 보이고, 장판도 너덜너덜해 보이고, 저 티비는 언제 샀지, 세탁기 소리가 이렇게 컸었나. 밥을 먹는데 엄마는 오늘 마을버스를 타서 50원인가 100원을 아꼈다고 앞으론 기다렸다가 마을버스를 타야겠다고 신나서 이야기하네. 우리 집이 이랬나? 이상했다.
이후로 나는 알게 모르게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인식이 뿌리 박혀 씀씀이가 전과 같이 유지되지 않았다. 고등학생이 쓰면 얼마나 쓰겠냐만 그냥 솔찬히 써왔던 것들을 조금씩 줄여나갔다. 그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날 나는 엄마에게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고 했다. 나는 그냥 기분 좀 낼 겸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한 건데, 엄마가 겁을 먹었다. 맛있는 거 어떤 거…? 나는 진짜 질릴 노릇이었다. 돈 없어도 그런 날엔 한 번 돈 좀 써주면 안 되나. 서운했다. 나는 그때 백화점에 딸린 뷔페가 가고 싶었다. 내 기억에 1인당 2만 원 정도였던 것 같은데, 기억이 틀릴 수도 있다. 아무튼 거기를 얘기하니 엄마는 졸업 날엔 원래 중국 음식을 먹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보통 그렇게들 많이 하겠지만 내가 먹고 싶은 걸 먹어야 되는 게 아니냐고 따졌다. 엄마는 몇 번 나를 설득하다 결국 나에게 져주고 뷔페를 가기로 했다.
뷔페는 조명을 분위기 있게 살짝 내려놔 낮인데도 불구하고 약간 어둑어둑했다. 그릇과 포크 나이프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도 악기가 내는 소리처럼 고급스럽게 들렸다. 엄마는 그런 분위기가 낯설어 서둘러 먹고 나가고 싶어 했으나 나는 그런 엄마의 마음에 맞춰주지 않았다. 딱히 부드러운 대화를 하지도 않으면서 천천히 먹었다. 엄마에겐 길고 긴 시간이 나에겐 아무렇지 않다는 것을 티 내면서 말이다. 그렇게 다음 접시를 담으러 일어났을 때, 나는 마음속으로 ‘아…’라고 외마디를 내뱉었다. 그저 발견에 의한 리액션이라고 하기에도 어느 정도 탄식의 정서가 담겨있었다. 담임 선생님이었다.
그랬다. 그 뷔페는 선생님들의 회식 장소였다. 그제야 내 장소 선택이 너무 기가 막혀서 이런 일까지 일어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동네에서 최대한 좋은 곳을 알아보려고 한 객기가 이런 일을 만들고 말았구나,라고 나는 생각했다. 생각을 마무리할 때쯤, 선생님도 나를 발견했다. 선생님은 첫마디가 이렇게 비싼 데를 왔냐고 했다. 엄마가 오늘만큼은 좋은 데 데리고 오고 싶다고 하셔서 온 거예요. 나는 거짓말을 했다. 선생님은 아무 말을 하지 않으셨는데, 아마 내 표정이 8교시에 공짜 수업을 듣지 않겠다고 했던 그날의 내 표정과 닮아있어서 어느 정도 연민을 가지고 내 거짓말을 믿어주시지 않았을까? 모르겠다. 졸업을 하고 선생님과 소주를 마시면서도 이 일화만큼은 물어보지 못했으니까. 창피해서 그랬다.
창피해서 이 이야기를 나는 내 친구들한테도, 가족들한테도 그 누구한테도 하지 못했다. 돈이 없다는 엄마에게 굳이 비싼 걸 얻어먹으면서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하고, 가난을 숨기고, 비싼 음식을 먹어봤다는 경험의 축적, 그리고 이 경험을 내가 만든 게 아니라 내가 사랑받는 애라서 생긴 경험으로 둔갑시키는 어설픈 비겁함. 나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보면 나 자신한테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이 이야기를 쓰게 된 건, 내 글을 보니 내가 정말로 받아들이지 못한 이야기들은 다 픽션의 형식으로 썼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쓸 당시에는 그렇게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쓰는 게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어설프게 숨긴 순간들이 내 마음속에 계속해서 고개를 내민다. 부끄럽고 아파 결국 3인칭으로 발화했던 이야기들, 왠지 이제는 1인칭으로 말해도 괜찮을 것 같다. 설령 이 얘기를 읽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할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