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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은 Nov 09. 2021

오늘 일기 03

짦은 픽션 07-3

*


이후로 우리는 자주 만났다. 보통 선화가 퇴근하고 오는 시간에 맞춰 동네에서 밥을 먹고 산책을 했다. 선화는 내가 돈이 없는걸 알았는지 주로 많은 금액을 선화가 지불했다. 나는 처음에는 적지만 모아놓은 돈을 아껴 쓰다가, 그마저도 어려워지자 우리 가족이 잔돈이 남을 때마다 넣어 놓는 저금통에서 500원짜리를 몰래 꺼내 가까운 가게에서 지폐로 바꿔 선화를 만나러 갔다. 그렇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나는 일자리를 조금 더 본격적으로 알아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다시 면접을 봤다. 동네 작은 가게에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부터 중소기업의 단기 계약직까지. 일곱 번째 면접에서 나는 일을 구했다. 작은 회사의 서류 정리 업무였는데, 글자와 숫자만 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업무를 맡게 되었다.


일을 구하고 나선 선화와 금요일, 토요일에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관계는 연애는 아니었지만 연애가 아니라고 하기엔 그런 사이가 되어있었고, 암묵적으로 서로 볼 수 있는 시간을 비워놓았다. 그러다 연애관계로 번지게 된 건 선화가 나에게 “너랑 있으면… 뭔가… 든든하달까?”라고 말한 날이었다. 나도 외로워 보이는 선화를, 나보다 거울을 많이 보는 그런 선화를, 챙겨주고 싶었다. 우리는 그동안 서로의 말에 감동했고, 서로에게 느꼈던 애틋함을 고백하며 연애를 시작했다. 월급을 받으면 우리는 조금 비싸고 맛있는 걸 먹으며 기분을 내면서. 그간 세상 사는 게 그렇게도 어렵고 우울했던 내가 다시 밖에도 나가고, 내 몸에 뿌리는 향수의 향기가 방에 남아있으면 엄마는 그렇게도 기뻐하며 나에게 요즘에 너무 좋아 보인다며 밝은 얼굴로 말했다. 행복해하는 엄마를 보며 나는 엄마도, 선화도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기 시작했고, 그렇게 된다면 그렇게 만드는 사람은 내가 아닐까 하는 불확실하고도 우수에 젖은 기대를 했다.


오늘 일기 챌린지가 끝났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포인트가 지급되었다는 알림이 떴다. 오랜만에 선화의 블로그에 들어갔다. 나와 함께했던 사진이 많이 있었고, 선화가 나에게 직접 보냈던 사진들도 많이 있었다. 그리고 전보다, 선화의 글이 행복해 보였다. 우리는 우리가 ‘오늘 일기’덕분에 만나게 되었다는 신기한 사실도 곧잘 이야기했었는데 선화의 포스팅을 보다 보니 왠지 만나게 될 운명이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러다 또, 은하가 생각났다. 은하는 이걸 안 할까? 네이버 블로그가 없는 사람도 없고, 은하의 성격을 되돌아보면… 왠지 이런 이벤트를 잘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은하는 자신이 덜렁댄다고 했지만 옆에서 본 바로 은하는 꼼꼼한 사람에 가까웠다. 나는 은하가 좋아하는 카페나 은하네 동네에 있었던 가게들을 검색해보며 은하의 포스팅을 찾으려고 애썼다. 선화에겐 잔다고 거짓말을 하고서.


나는 머릿속에 은하에 대한 마인드맵을 미친 듯이 그려나갔고, 내가 이렇게도 은하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이 많다는 게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헤어졌을까? 그런 생각이 뻗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은하의 블로그를 찾았다. 모든 포스팅을 누르기가 무서웠다. 그저 은하의 일상이 담겨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왠지 내가 은하에게 줬던 상처나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이 나쁘게 해석되어 있을까 봐 두려웠다. 나는 최근 몇 개의 포스팅을 두어 개만 보고선 나와 은하가 헤어졌던 시기에 올린 포스팅을 찾았다.


다른 포스팅에 비해 사진이 별로 없었고, 글자가 많았다. 글은 화가 났다가, 슬펐다가, 지쳤다가, 우울해 보였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여행을 가고 싶다, 역시 세상은 혼자 사는 거다, 세상에 사랑은 없다 같은 말들. 그리고 그나마 몇 장 있는 사진들은 은하가 좋아하는 디저트라는 게 와중에 귀여웠다. 포스팅은 점차 밝아졌고, 사진이 많아졌다. 가끔씩 은하와 함께 저녁을 먹었던 은하의 친구들도 볼 수 있었다. 자격증 공부한다더니 결국 합격했구나, 결국 부모님과 함께 사업을 열었구나 하는 최근 소식들은 덤이었다.


*


회사에서는 나의 업무 처리가 맘에 든다며 정규직을 제안했고, 자소서와 면접을 준비할 필요 없이 더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을 거절할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그리고 나에겐 선화가 있었고, 엄마가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부터 선화는 나에게 서운해하는 일이 많아졌다. 나는 그런 선화의 마음을 알 수 없었고, 어쩐지 선화와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전보다 비싸고 맛있는 걸 먹으면서 우리의 대화는 전보다 적어졌다. 그리고 선화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다시 거울을 아주 자주 보기 시작했다.


“거울을 왜 그렇게 자주 봐”


선화는 머쓱하게 거울을 집어넣었다. 와중에 선화는 어딘가를 또 시술받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순간 선화에게 어떤 답답함이 느껴졌다. 이유를 물으니 ‘그냥… 뭔가…’라며 모호한 대답을 했다.


“그러면 행복할 것 같아?”


선화는 불현듯 놀란 눈을 하고 그 눈엔 눈물이 고였다. 나는 내가 잘못된 말을 했구나, 하는 걸 선화의 눈을 보고서 깨달았고 그때는 이미 늦었을 때였다. 선화는 나에게 뭐라고 말했는데, 나는 급하게 내 말을 수습하느라 도대체 내가 어떤 말을 내뱉고 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나는 그날 집에 돌아가서도 선화에게 계속해서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선화에겐 답이 없었다. 그날 밤, 꿈에는 은하가 나왔다.


은하와 나는 지하철에 타고 있었다. 은하는 헤드폰을 쓰고 앉아있었고, 나는 은하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꿈속에서 내 목소리는 음소거 되어있었다. 은하는 헤드폰을 쓴 채로 맞은편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내릴 역이 다가와 은하에게 다급하게 내가 전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듯이 뱉었고, 은하는 마지막이 되어서 문 앞에 서있는 나를 멍하니 쳐다보다 눈을 느리게 꿈뻑 했다. 그건 인사처럼 느껴졌지만 인사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내린 곳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 역에서 내린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


계절이 바뀌어갔고, 더 이상 편의점 테이블에서 먹기에는 쌀쌀해졌다. 선화는 네일아트를 받았다며 가을에 어울리는 색으로 물들인 손톱을 내게 보여줬다. 뿌리 염색도 했다며 머리 위를 가리켰다. 예쁘네,라고 내가 대답했다.


“근데 암막 커튼 얼마나 해?”


“암막 커튼 달려고?”


잠을 잘 못 잔다고 자주 말했었다. 꿈을 자주 꾸기도 하고, 꿈을 꾸지 않아도 깊이 자지 못한다고. 그러고 보니, 나는 잠을 언제부터 잘 잔 거지? 암막 커튼을 달고도 그렇게 잘 잤던 건 아닌 거 같은데… 생각해 보니, 일을 다니면서부터였다. 그곳에선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었다. 만약 내가 안 나오고 새로운 사람을 뽑아 가르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긴 했다만, 누구도 그렇게 말하진 않았고 모두가 그 과정을 귀찮게 생각했으니, 내가 아무렴 쓸모 있는 사람이었다.


중고거래를 무서워하는 선화를 위해 내가 대신 찾아보고 구매를 도와줬다. 내가 먼저 사면 선화가 돈을 입금해 주겠다고 했는데, 받지는 않으려고 했다. 역 근처 대형마트 앞에서 남자를 만나 커튼을 받고 금액을 건넸다. 집에 도착하니 방금 씻은 선화가 물기를 닦으며 앉아있었다. 걸려있는 커튼 봉을 내리고 커튼을 끼웠다. 아래엔 혹시나 도와줄 게 있을까 싶어 목을 위로 쭉 뺀 선화가 있었다. 내려와선 커튼을 한번 쭉 끝까지 쳐봤다. 방은 금세 어두워졌고 탁자나 의자 모서리에만 빛이 조금씩 내려앉았다. 그리고, 서서히 가까워지며 입술을 포갰다. 어두운 방에서 하는 키스는 더 선명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화는 내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나는 도대체 왜 그러냐며 선화에게 이유를 물었지만 선화는 ‘미안해 내가 못나서 그래’라는 식으로 대화를 회피했다. 선화네 집에 찾아가도 선화는 보이지 않았고, 퇴근 후 원래 가던 골목에도 전혀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던 선화랑 마주친 건 우리가 처음 만난 편의점에서였다. 마주치는 걸 기대했던 게 아니어서 나도 모르게 선화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런데 선화는 나와는 반대로 자연스럽게 눈빛을 보내며 아는 체를 했다. 그게 선화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날 나는 또 한 번 꿈을 꿨다. 저번 꿈과 이어졌다. 내린 지하철역에서 두리번거리던 나는 누군갈 찾고 있었고, 그건 은하인 것 같았는데 은하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선화야. 내가 불렀고 걸어가던 선화가 뒤를 돌아봤다. 선화는 무슨 말을 했는데, 나는 선화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입모양은 보이는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선화의 말을 추측했다. 그러나 선화는 내가 알아듣지 않아도 괜찮은지 부드럽게 웃으며 어딘가 슬퍼 보이는 눈을 하고 계단으로 걸어나갔다. 열차가 어두운 통로를 빠져나가고 이내 조용해졌다. 텅 빈 곳에 내가 서있었고, 모두가 나를 떠나갔다.


꿈에 너무 기운을 뺏겨 일어나서 물을 마시려 부엌에 갔다. 보리차를 꺼내 따르는데, 문득 여름날 선화와 함께 먹던 맥주가 생각났다. 더불어 내가 선화와 엄마 그리고 내 주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만 같던 그 마음도. 그 누구도 내가 행복하게 만들진 못했고, 거기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 안에서 또 하나의 무언가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모든 게 텅 비어있는 느낌이었다. 물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오니 탁자와 의자 모서리에 작은 빛이 내려 앉아 있었다. 얼마 전에 커튼을 달았던 선화의 방처럼, 선화를 만났던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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