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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은 Nov 09. 2021

오늘 일기 02

짧은 픽션 07-2

시간을 따져보니 벌써 2년하고도 두 달이 지났다. 은하와 했던 연애. 은하와 나는 3년 동안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하다 결국엔 헤어졌다. 은하는 스물두 살때 국숫집 아르바이트를 하며 만났다. 내가 8개월 차였고, 은하는 갓 들어온 신입이었다. 그때 나는 은하를 가르쳐야 했고, 은하는 나를 많이 따르고 작은 실수에도 어쩔 줄 몰라 하며 여러 번씩 사과를 했다. 나는 서투른 은하를 챙겨주고 싶었고, 은하는 내가 든든해 기대고 싶다고 했다. 그러던 은하가 날 떠난 건, 내 실체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대학이 끝날 때가 되니까 패배자의 마음으로 모든 것에 비관적이 된 나는 세상뿐만 아니라 은하에게도 시니컬하게 굴었다. 하루는 은하가 밥을 먹다가 ‘오빠 제발… 먹을 때만이라도 그냥 생각 없이 웃으면서 먹으면 안 돼?’라고  말했는데, 나는 거기다 대고 ‘너야 세상살이 불편한 거 하나 없으니까 그럴 수 있겠지’라고 말했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


선화와는 2시간에서 4시간이라는 긴 텀으로 끊길 듯 끊기지 않으며 매일같이 연락을 했다. 주로 동네에서 각자 보물처럼 여기는 장소들을 공유했다. 어디서 어디로 산책하는 길이 예쁘고, 어디에 있는 식당이 의외로 계속 가고 싶다, 같은 것들. 그러다 선화가 자신의 집 근처의 편의점 밖에서 먹는 맥주가 정말 맛있다고 했다. 나는 바로 ‘언제 같이 마시자’라고 말했다. 선화에게선 사상 최고의 텀인 6시간 만에 ‘음… 그래…!ㅋㅋ’라는 어딘가 찜찜한 답장이 왔다. 그 대답에 나는 대화를 다른 주제로 넘기려 했건만, 선화가 되려 나에게 시간이 언제 괜찮냐고 물어보았다. 아무 때나. 그렇게 말하고 싶진 않았지만 나는 정말 아무 때나 가능한 사람이었다. 선화와는 금요일에 보기로 했다.


엄마 몰래 바지를 다리미로 다렸다. 은하랑 헤어지고 나서는 한동안 뿌리지 않았던 향수도 오래간만에 뿌리고 밖을 나갔다. 후텁지근한 공기가 느껴져 여름이 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바람에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가 듣기 좋았다. 매일 가던 편의점을 지나 골목을 꺾었다. 그건 마치 결계를 푸는 것 같았다. 이 골목을 꺾어본 지가 언제였을까. 거기엔 화창한 햇살이, 내가 보지 않겠다고 했던 햇살이 있었다. 천천히 그 빛을 따라 걸었다. 아직 선화와의 약속시간까지는 10분 정도가 남아있었다. 근처를 어슬렁어슬렁 거리다 보니 선화가 거의 도착했다는 연락을 보냈다. 나는 편의점 앞에 멀뚱멀뚱 서있었고, 누가 내 어깨를 톡 건드렸다. 뒤를 도니, 선화가 아니라 모르는 여자였다. 모르는 여자는 내게 이렇게 말을 했다.


“오랜만이야”


“선화…?”


선화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화는… 선화가 아니었다. 선화라고? 우리는 편의점에 들어가서 맥주와 과자를 샀다. 나는 선화를 곁눈질로만 보며 대화를 나눴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마주 앉을 때는 선화를 제대로 쳐다보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런 나를 보고 선화는 다 안다는 듯이 부드럽게 웃었다.


“얼굴이 많이 바뀌었지”


선화는 얼굴 주변을 손으로 조금 훑으며 그렇게 말했다. 선화의 눈동자 위로는 선명한 선이 눈꼬리까지 곡선으로 이어져있었고, 수술인지 시술인진 모르겠다만 갸름한 턱 위로 콧방울 끝이 톡 올라와 있었다. 그 외에도 정확하게 어디가 바뀌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선화는 분명 정말로 많이 달라져있었다.


“어떻게 지냈어?”


“나 그냥 졸업 유예하고… 일자리 알아보고 있지”


“잘 지냈네!”


그 말에 놀라 나는 선화의 얼굴을 처음으로 빤히 쳐다봤다. 정말로? 내가 잘 지냈다고? 나는 그렇게 되물었는데, 선화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살잖아. 그럼 괜찮은 거 아닌가?’라고 말했다. 순간 그런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넌 어떻게 지냈어?”


“나… 나는 뭐, 나도 뭐… 그냥 그렇지”


선화는 맥주 캔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는데, 예전과 많이 달라진 얼굴을 두고 하기엔 맞지 않는 말이라는 걸 아는 듯했다. 물을까 하다 말하기 싫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별말 하지 않았는데 선화가 한 모금을 마시고선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좀 다 잘 안 풀렸어”


처음에는 연애가 그랬고, 그다음엔 취업이 그랬다고 했다. 듣자 하니 처음 사귄 남자친구가 선화의 외모 지적을 많이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취업… 나도 이해가 됐다. 요즘엔 ‘면접 성형’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어떤 직업을 위해서 선화는 얼굴을 바꾼 걸까? 지금은 일해?


“그냥… 경리 일하고 있어!”


그렇게 말하고 선화는 남은 맥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두 번째 캔은 날씨 탓에 미적지근해져있었고, 확실히 여름이 왔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름이면… 벌써 한 해의 반이 지나갔음을 뜻했다. 난 지금 뭘 하고 있지? 나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반년을 보냈다는 사실과 앞으로 남은 반년도 아무것도 계획된 게 없다는 사실에 갑자기 목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맥주를 더 들이부으며 그 기분도 저 어딘가로 넘어가기를 바랐다. 선화는 핸드폰 액정으로, 손거울로 틈만 나면 얼굴을 확인했다. 선화는, 참 예뻤다. 그런데 선화는 행복할까? 오랜만에 마시는 맥주는 너무나 달콤했고, 슬슬 취기가 오르면서 그런 추상적인 것들이 알고 싶어졌다. 결국 선화를 데려다주는 길에 카카오톡 아이디는 먼저 물어보더니 만나기는 싫어하는 것 같았다는 궁금함과 서운함을 술기운을 빌려 말했다.


“모르겠어, 자신감이 생기다가도 내가 부끄러워. 돈 들여서 수술해놓곤 참…”


“행복해야지… 행복해야 돼”


술기운이 오른 나는 난데없이 행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까 거울을 보던 선화가 행복한지 궁금하다는 생각에서 터져 나온 말인 게 분명했다. 그때 선화의 눈이 반짝거렸다. 당시에는 나의 술기운에 이른 착각인 줄 알았는데, 그 직후에 선화가 나에게 잦은 연락을 하는 것으로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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