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대에는 예술이 ‘예뻐서’ 온 친구들이 더러 있었고, 나도 어느 정도는 그런 마음이었다. 속된 말로 뽀대 나니까. 그래서 수업 내용은 몰라도 괜찮은 쇼핑몰은 알았으며, 작가는 헷갈려도 예쁘고 멋진 일반인에 대해선 알았으며, 출석은 제쳐도 미용실이나 네일샵은 꼬박꼬박 다녔다.
그러나 예술은 그렇게 예쁜 게 아니었고, 교수님들은 그런 예쁨에 꺾일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어물어물 대답하면 C였고, 안 나가면 F였다. 그리고 끝까지 물어보셨다. 넌 왜 이걸 했어? 이걸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게 뭐야? 어떤 걸 느낄 거라고 생각해? 같은 것들. 과제여서 했는데요,라고 하기도 뭐해 입 꾹 닫고 있으면 교수님은 말했다. 다음.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그 자리에선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술자리에서 내뱉었다. 지가 과제해오라니까 해갔는데 왜 만들었냐고 물어보더라? 존나 그런 질문 왜 하는 거야? 누군가 이렇게 말하고, 나머지는 웃는다. 그러다 그 자리에선 누군가 왜 난 네 작업 좋았는데, 같은 어쭙잖은 소리를 하고 누군가는 위로를 받는다. 그러면서 그게 또 호감인 상대면 잠자리로 전개되는 요상한 홍상수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런 과정은 학기 중엔 그나마 유하게 넘어갔지만 졸업 때는 예외였다. 그러면서 애들은 갑자기 서로서로 일종의 고백 같은 것을 주고받았다. 예술을 등지고 다른 걸 향한 마음 같은 것들. 그건 보통 꽃이거나 옷이었다. 그쪽으로 전과를 하거나 편입을 하는 친구들이 더러 있었는데, 어떤 땐 그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다. 나는 여기저기 예술하겠다고 객기 부려놔서 꼼짝없이 졸업해야 하는데 말이다.
예쁘지도 않고 알아갈수록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만 하는 게 예술이란 거라는 걸 알아버리면서는 어떻게든 그 지긋지긋한 것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그래서 그냥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눈 꼭 감고 졸업을 했다. 그렇다고 졸업 이후 일반적인 삶을 잘 해내지도 못했다. 한동안은 개성과 일반에서 갈피를 못 잡았다.
그러면서 일은 일대로 하고, 예술이라고 하기도 뭐한 작업 같은 것을 하며 예대라는 것을 어떤 땐 무던하게, 어떤 땐 쑥스럽게 말한다. 그건 한때 예술에 대한 어떤 커다란 마음이 지금은 어딜 향해있는 건지 헷갈리기 때문이다. 예술은 뭘까. 미술관에 걸린 게 예술이었던 예대 시절에서 끝내주게 맛있어서 못 잊는 음식만이 예술이 된 나의 마음은 때때로 그때가 그립다.
1학년 때, 당시의 우리에겐 어려운 실기 수업이 있었다. 실기인 만큼 생각을 담론화하는 것이 아니라, 시각화했어야 했다. 그건 풋내기 1학년에겐 어려웠고, 학기말엔 다들 시니컬하거나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며 앉아있었다. 그런 우리에게 선생님이 해주셨던 말이 있다. 사물에 대해서 생각하는 게 되게 어렵죠, 근데 이런 일을 하는 게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건 아닐 거예요. 선생님은 지나가는 말로 하셨던 것 같은데 나에겐 여전히 남아있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엔 어두운 고가도로 사이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 노을은 어떤 땐 강렬해 보이고, 어떤 땐 슬퍼 보이며, 어떤 땐 아름다워 보이면서, 어떤 땐 공허해 보였다. 그렇게 연약한 시기에 꼼짝없이 진실을 봐야만 했고 인정해야만 지나 보낼 수 있었던 예쁘지 않은 시간들이 이따금 노을을 볼 때 생각난다. 노을은 나타나기 무섭게 언제 그랬냐는 듯 모습을 감추는데, 그건 나의 상념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이내 어두워진다. 그러면, 수많은 평범한 얼굴들이 어둠 속에 물든다. 그 장면 또한 어떤 종류의 진실이며 내가 인정해야 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깨닫기까지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났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