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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은 Aug 19. 2022

헤어지는 일



헤어진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가끔 난 연인의 헤어짐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옷 다 벗고 섹스하며 서로의 몸매가 어떤지, 어떤 냄새를 갖고 있는지, 눈빛이나 표정만 봐도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있는 사이에서 손끝 하나 만지지 않는, 아니 눈빛조차 닿지 않을 것을 암묵적으로 약속하는 사이로 변한다는 것이 이상하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도망치듯 이별한 적이 있고,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서 도망치듯 떠나감을 본 적도 있다. 그럴 때면 너무 사랑하는 건 하면 안 되는 행동인가, 잠깐 생각했지만 그런 질문에 대한 생각은 일단 접어두기로 했다. 어쨌거나 떠났으니까.


나에겐 그런 이별이 반복됐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이나 반복되다 보니 그건 곧 나의 매뉴얼이 됐다.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서서히 멀어지다가 갑자기 이별을 말하는 것. 이유를 말하지 않고, 돌아보지 않는 이별. 영화나 드라마에선 이렇게 이별하진 않는 것 같긴 한데. 보통은 만나서 이야기하고 그러는 게 예의라고는 하던데. 나와 그들은 서로에게서 도망치고, 도망쳤다.


그런 이별 방식은 어쩐지 사랑하는 방법조차 망쳐놨다. 예를 들면 만나기로 약속한 날 근처가 돼도 그에게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약속은 어쩔 수 없이 분위기 때문에 한 건데 막상 데이트에 대한 얘기를 꺼내면 그가 싫어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약속 당일, 약속 시간에 그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달랬다. 오히려 실제로 약속한 날, 약속한 시간에 그가 나타나면 오히려 의아했다. 심지어 어느 날엔 입밖으로 내뱉은 적도 있다. 진짜 왔네.


그래도 결국 또 이별하고, 이별했다. 인생의 어느 지점이 되니 헤어지자는 말이 입에 착 감겼다. 반면 사랑한다는 말은 목구멍에 틀어 막혀서 절대 나오지 않았다. 이런 삶을 내가 원했던가. 계속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 분명 아니다. 헤어지잔 말만 잘하면서 살고 싶었던 게 아니다.


그래서 헤어졌다기보단 말하자면 서로에게 나타났다 사라진 그 관계에 대해서 나는 이따금 이상한 의문에 잠길 때가 있다. 정말로 내가 그와 사귀었던 것인가? 그와 내가 정말 손을 잡고 거리를 걸으며 일상을 말했던 것인가?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을 봐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내게서 영영 사라져 버렸으니까.


이별은 헤어짐일까? 헤어짐은 잊음일까? 개인적으로 헤어지고 나면 그와 관련된 모든 물건들을 버리고 사진을 지운다. 물성이 얼마나 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가시적인 추억들을 모두 없앤다. 그러면 잊힐까? 마음 같지 않게 주변에서 이야기가 들려올 때가 있다. ‘합정에서 너 전 남자 친구 봤다’, ‘틴더 하다가 너 예전에 만난 애 본 것 같은데… 얘 맞지?’, ‘얘 인스타그램이 갑자기 떠서 봤는데…’ 같은 말들. 알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들었을 때 마냥 무시를 하지도 못한다. 갑자기 거슬린다. 그러면서 그날은 집에 갈 때, 또는 잠에 들기 전에 그와의 시간들이 떠오른다. 어떤 기억엔 여전히 화가 나고, 어떤 기억엔 아직도 씁쓸함을 느끼면서.


슈가볼의 ‘9시’라는 노래에선 ‘널 꺼내보려 했던 건 아닌데… 지나가는 자동차는 너의 옛 번호를 가졌어’라는 가사가 있다. 노래는 이 장면으로 시작되는 감정을 담고 있다. 아직도 번호가 그대로일까? 모두 잊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왜 갑자기 날 멍하니 멈추게 만드는 걸까, 하는 것들.


늘 똑같은 날이었다. 남자친구랑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중, 나의 영화 편식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나는 마블이나 애니메이션 종류의 영화를 보지 않는데, 문득 그런 영화도 봐야 나의 감정적인 스펙트럼이 더 넓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 친구는 그런 나의 다짐을 듣고 바로 디즈니 플러스 이용권을 결제했다. 그와 나의 생일이 뒤섞인 비밀번호를 입력해 로그인을 했다.


제목은 많이 들어봤지만 내가 보지 않은 영화들이 수두룩했다. 슬라이드로 넘기다 보니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가 있었다. 남자 친구는 띄엄띄엄 봐서 잘 기억이 나지 않아 다시 봐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 영화는 미술적으로 아름다운 게 전부가 아니라고, 스토리가 정말 좋다고 이야기하며 내가 좋아하는 장면을 말했다. 파이가 마지막에 그 작가한테 떠난 리처드 파커와의 기억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파이는 ‘삶이란 결국 그런 거죠. 보내는 것… 하지만 가장 가슴 아픈 건 작별인사조차 못했다는 거죠’라고 말한다. 그때 갑자기 문득 마음속의 어떤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바로 남자 친구한테 말했다. 나 오늘 글 써야겠다.



빈 창을 켜두고 <라이프 오브 파이>의 대사를 앞뒤로 더 찾아봤다. 파이는 이렇게 말한다.


‘나와 함께 표류하면서 날 살게 해 준 리처드 파커는 그렇게 내 삶에서 영원히 사라졌죠. 난 아이처럼 엉엉 울었죠. 이젠 살았다는 기쁨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가버린 리처드 파커가 야속해서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난 리처드 파커에게 친구가 아니었죠. 생사를 같이했는데 돌아보지도 않고… 하지만 녀석의 눈에 비친 게 결코 내 모습만은 아니었어요. 틀림없어요 느꼈거든요. 입증은 못하지만… 삶이란 결국 그런 거죠. 보내는 것… 하지만 가장 가슴 아픈 건 작별인사조차 못했다는 거죠.’라고.


리처드 파커를 나를 떠나간 연인들로 바꿔 발음해보니 파이의 감정과 그동안 나의   없던 감정이 정확하게 해석됐다. 헤어졌기 때문에 ‘이별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이별하지 못한 헤어짐이었다. 그건 나의 마음 속에서 잔여물처럼 둥둥 떠있었다. 그런 마음에 대해 여전히 알지 못했다가 문득 디즈니 플러스 이용권을 결제한 일로 알게돼 이렇게 이별에 대한 글을 줄줄이 쓰고 있다. 정말이지 노래 가사처럼 꺼내보려 했던  아닌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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