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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은 Jul 10. 2024

예술은 뭐 하러 있을까



 마술사가 큰 천을 바닥에서 올린다. 허리춤에 손을 얹고 환하게 웃는 미녀가 점점 천으로 가려진다. 마술사는 올라간 천을 향해 손바닥을 오므렸다 피기를 반복하며 마치 주문을 거는 시늉을 한다. 주문이 어느 정도 걸렸는지 눈에 힘을 주고 객석을 쳐다보곤 이내 천을 내려놓는다. 천이 차르르 물결처럼 하강하면 미녀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텅 빈 세트장만 보인다. 그렇지만 마술사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듯 다시 천을 올리고, 좀 전에 했던 주문의 손짓을 다시 한다. 그리고 다시 천을 내린다. 그러면 활짝 웃는 미녀가 다시 아까처럼 서있다. 미녀는 손을 반짝 들고 허리를 흔들며 춤을 춘다. 마치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한 번도 사라진 적 없다는 듯. 


 중고등학교 시절 내가 했던 최대의 착각은 세상 사람들이 다들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중 내 친구들은 나와 더 많은 부분을 닮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가 예술을 좋아하니 사람들도 예술을 좋아할 줄 알았다. 내가 본 영화를, 내가 읽은 책을, 내가 간 전시를, 내가 듣는 음악을 나와 같이 즐길 줄 알았다. 그 착각은 예대에 진학하고 1학년이 끝나갈 때까지도 지속됐다. 참 오래도 착각했는데, 그 착각이 끝난 건 어느 날 고등학교 친구들과 어딘가를 놀러 갔다 돌아오는 버스 안이었다. 그날도 나는 친구들에게 학교에서 흥미로웠던 수업이나 동기들 작업, 내 과제에 대한 내용을 신이 나서 설명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내 이야기가 끝나고 어떤 반응도 하지 못했던 친구들의 표정이. 어서 다른 주제로 흘러가길 바라는 친구들의 눈빛이. 


 살다 보니 내 친구들만 그런 건 아니었다. 사람들은 예술에 꽤 관심이 없다. 그래서 내가 보기엔 전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던 영화가 천만 영화가 되는 걸 볼 때마다, 전시장에서 다음 작품을 보려면 셔터 소리가 끝나기를 기다릴 때마다, 지하철에서 모두 숏츠를 보는 풍경을 볼 때마다 어쩐지 마음이 엉키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었다. 솔직히 한동안은 사람들이 조금 더 예술에 관심을 가져주길 바랐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도 오랜 시간 삶을 빤히 들여다보니 사람들이 예술에 관심을 가지기는 어려운 것 같다. 저마다 먹고살기 바쁜 그들이 어떻게 또 생각하는 일을 자처할 수 있을까. 열린 결말은 답답하고, 사람들 다 봤다니까 궁금한 드라마는 배속으로 보고, 책은 펼치기만 하면 졸리고, 음악은 요즘 사람들이 좋다는 거 듣고, 어쩌다 전시에 가면 오랜만에 갔으니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한 쪽에 가깝다. 삶의 필수 요소는 역시 의식주니까. 여태 5권의 책을 쓰는 동안 내가 단 한 번도 일을 그만 두지 못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으니까. 


 그런 나에게 최근에 좌절을 안겨준 건 사람들이 책을 너무 읽지 않는다는 글을 읽었을 때였다. 글의 내용은 베스트셀러도 그렇게 많이 팔려서 베스트셀러가 아니고, 일반서는 거의 팔리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이 책을 너무 읽지 않는다고. 그런데 댓글의 8할이 ‘책이 비싸다’는 내용이었다. 믿을 수 없어 스크롤을 올리고 내리기를 반복했지만 정말로 도서정가제나 폐지하라고, 책이 비싸서 못 사겠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요즘 사람들 대부분은 에어팟이며 스마트 워치를 소유하고,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오마카세 또는 호캉스에 대한 경험도 가지고, 국내 브랜드 옷들도 보통 10만 원이 넘는 요즘, 비싸봤자 2만 원인 책이 뭐가 비싸다는 걸까? 책을 읽지 않는 이유가 정말 가격 때문일까?


 사람들이 사느라 바빠 예술에 관심이 없고, 어쩌다 접할 기회가 생긴다면 예술이 적당히 예술답길 원하는 건 충분히 이해했다. 그렇지만 예술을 소비하지 않는 이유가 점점 많아지기만 하는 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갈피를 잡을 수 없이 어수선했다. 한동안 예술가의 존재 이유를 골몰했던 적이 있었다. 먹고사는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데 예술가는 대체 뭐 하러 있을까. 그러던 어느 날 고민 끝에 반짝이며 생각이 정리됐다. 예술가의 일은 ‘대신 생각해 주는 일’이었다. 사는 게 바빠 삶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으니 대신 생각해 주는 사람들. 지나간 감정과 느낌을 다시 데리고 와 그림으로, 영화로, 글로, 음악으로 느끼게 해주는 사람들. 


 언젠가 당신을 구원해 줬던 예술을 한 번 생각해 보자. 연인과 이별 후 찢기듯 아픈 마음에 부드러운 연고를 발라줬던 음악을. 머릿속에 이루지도 못할 이야기들이 펼쳐져 순식간에 2시간이 지나갔던 영화를. 반신반의하며 읽다가 마침내 고요한 울림을 심어주었던 책을. 정말로 예술이 필요가 없을까? 다시 첫 문단의 표현으로 돌아가보면, 나는 예술이 환히 웃는 미녀 같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환호할 때는 미녀가 사라졌을 때가 아니라, 미녀가 다시 등장했을 때이다. 존재를 증명하듯 손을 반짝 들고 허리를 흔들며 춤을 추는 미녀를 보며 사람들은 웃는다. 만약 그녀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면, 영영 사라져 버렸다면 누가 웃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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