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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e Apr 29. 2020

대기업이면 다 괜찮을 줄 알았다

대기업에 입사하는 게 목표였던, 철 없던 과거에 대한 회상


나는 대기업에 입사하는 게 목표였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나는 나의 미래에 대해 큰 고민이 없었다. 직무? 그런 건 잘 모르겠고, 그냥 대기업에 입사하려고 했었다. (지금 이걸 쓰면서도 이해가 안 되는 그 당시의 여리고 멍청한 목표다.)


내가 졸업한 그 해에도 지금처럼 취업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내 주위 소위 '잘 나간다'는 동기 혹은 선배들은 내로라하는 기업에 최종 합격만 여럿 받아 행복한 고민에 빠진 사람들도 있었고, 나처럼 '그럭저럭' 평범한 사람들은 수십 개 혹은 세 자릿수가 훨씬 넘어가는 기업에 서류를 넣어보고 '귀하의 능력은 출중하오나...'로 시작하는 불합격 통보 메일을 받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 시기에 나는 운이 좋게도, 원하던 대기업에 입성했다. 지극히도 어리고 세상을 몰랐던 나는 그게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나 스스로에게 그동안 수고했다며 합격 소식을 들었던 그 주만큼은 마음껏 술로 배를 채우고 보고 싶던 영화들을 연이어 (노트북으로) 감상하며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누구나 예상하는 것처럼)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학교에서는 내가 원하는 수업을 골라서 수강 신청을 했고, 같은 과에 맘에 안 드는 녀석들이 있으면 안 보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놈의 회사는 그럴 수가 없다는 걸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쓸데없는 고민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 당시, 주니어였던 나는 한참을 고민하면서 내 회사 생활에 대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1. 나는 왜 보고되지도 않을 보고서를 쓰는데 이렇게 긴 시간을 허비해야 하고, 또 그 보고가 끝나면 '이야, 근데 다리는 참 우리 회사에서 제일 예뻐'라는, 보고서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피드백을 상사로부터 들어야만 했을까


2. 회식이 끝나고 맨 정신에 택시를 타는 내 모습이 보기 싫었는지, 나의 상사'들'은 왜 회식 때마다 그렇게 술을 권하고, 올림픽대로 갓길에서 한참을 토하게 만드는 걸까


3. 한 달에 한 번, 혹은 두 달에 한 번 가는 워크숍은 왜 대학생 때보다 더 더럽고 정리 안 되는, 개판 오 분 전 술판으로만 채워지는 걸까


4. 그러다 어느 날은 이 곳이 '회사'임을 다시 상기시키기라도 하는 듯, 회사 실적이 조금이라도 안 좋아지면 곧바로 실무자의 책임인 듯 들리게 쩌렁쩌렁 큰 소리로 부하 직원을 혼내는 걸까


엄청난 자괴감이 몰려오는 사회생활을 약 3년 정도 이어오던 중, 이대로 가면 안 되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드라마에서 봤던 것처럼 과감하게 사표를 내던졌다. (이 표현은 조금 이상하다. 그 회사는 퇴사를 결심하면 종이로 내던질만한 게 없었다. 모든 게 전재결재화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뭔가 사표를 내던졌다!라고 표현하고 싶다.) 이건 내 인생 최고의 도전이었다.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이건 아니다'라고 주장해 본 적도 없고, '나는 못하겠다'라고 백기를 든 적도 없었다. 순리대로 살아야 할 것 같았고 대학을 졸업하면 응당 대기업에 가야 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그 당시 나에겐 일종의 '순리'였다. 너무 어렸던 나머지 복잡하게 꼬이고 얽힌 실타래를 풀어내기 위해 내가 찾아낸 방법은 '사표'였다. 


어쩌면 남아있는 자들은 나를 조직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나버린, 도망자로 표현했을 수도 있다. (아니 심지어 그렇게 얘기하는 선배가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듣기도 했다.) 다른 이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게 자존심 상하다고 느낄 무렵 내가 왜 대학교 4학년 때까지 나는 그저 대기업만 가면 모든 게 잘 풀릴 거라고 생각했는지를 되짚어봤다. 생각해보니 나는 지독하게도 말 잘 듣는 모범생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부모님이 나에게 어떤 학교나 회사를 강요했던 건 아니었지만, 앞서 말한 '순리대로 사는' 20대의 삶에 대해서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서울의 4년제 대학과 대기업이라는 연결고리를 만들어냈다. 평소에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지만, 남들보다 뒤처지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꽤 자주 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연결고리 세계에 들어가 MARVEL 닥터스트레인지(Doctor Strange)의 '도르마무'와 같이 끊이지 않는 반복 학습을 해왔던 것 같다. 


회사 생활, 조직 생활은 특정 회사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시기에 마주하게 된 조직과 사람들, 그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운이 없게도 그 당시 마주한 환경이 마침 너무나 블랙홀 같았을 뿐이었다. 이런 블랙홀은 대기업이라고 해서 해결해주지 않는다. 그걸 마주했을 때 이겨낼 능력이 나에게 있어야 하거나, 아니면 그걸 커버할 만큼 내가 가진 목표나 지향점이 있었다면 좀 더 좋았겠다 라는 아쉬움이 아주 뒤늦게서야 생겼다. (그런데 이 와중에, 첫 회사에 과감하게 사표를 내밀고 나서 나는 또 다른 대기업으로 이직했다...)




대기업이면 다 되는 건 아니다. 부모님이 어디 가서 당신 딸 뭐하냐고 물었을 때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점 말고는 대기업이라서 뭔가 잘 풀리고 잘 되는 건 없었다. (아니 없는 게 당연한 건데 24살의 내가 지나치게 순수했던 것 같다.)


몇 년의 블랙홀을 경험한 끝에 그래도 짬이라는 게 생겨 웬만한 거친 폭풍에 쓰러지지 않게 되었다는 것으로 우선 감사함을 느끼며, 그래도 아직까지 회사 생활/ 조직 생활은 나에게 너무나 어렵고, 버겁고, 부담스러운 존재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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