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줄 알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지만도 않은 과거의 연인
뒤돌아보면, 인연을 찾는 과정에 있어서 나는 꽤 먼 길을 돌았고 많은 방황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누구에게나 시행착오의 시간은 있기 마련이고, 하나같이 나와 딱 맞아떨어지는 듯했던 과거의 인연이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 어떤 것도 나와 맞지 않았고 어쩌면 그저 그 관계가 가장 완벽한 관계가 되길 바라는 소망에서 오는 착각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친구를 만날 때에도 신뢰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사소한 약속 시간을 잘 지키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도 분명 존재하고, 지나가는 말로 했던 얘기를 상대방에게 실천했을 때 느끼는 감정도 역시 존재한다. 연인 관계라면 이런 신뢰의 문제는 다른 어떤 중요한 관계만큼이나 필요하지 않을까. 잠이 오지 않는 어느 새벽, 나는 왜 과거에 연인과의 관계에 실패했는가를 생각해보다가 서로에게 신뢰의 끈이 팽팽하게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예를 들면, 과거의 연인 A는 내게 항상 함께 여행 가기를 요청해왔지만 나는 한 번도 그의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면서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단단할 것만 같던 A와의 관계가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했던 것도 여행과 관련된 대화가 싸움으로 이어지고 난 이후 부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여행을 갈 수도 있었다. 나는 대학생 때부터 친한 친구들과 여행을 자주 다녔다. 일주일 넘게 해외를 다녀오거나, 1-2박 정도의 짧은 지방 여행 혹은 서울 시내 호텔에서의 외박도 종종 있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부모님께 거짓말을 하는 것에 엄청난 부담을 느낄 정도의 효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당시 사랑해 마지않던 그의 칭얼거림을 거절하기에 바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와 나의 사이에는 믿음이 부족했던 것 같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과거의 그가 단순히 '나와 함께 하는 여행 자체를 기대하는'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 그의 태도가 아마도 나를 그렇게 믿게 만들었던 것 같다. 여행 얘기에서 의견이 틀어지면 그는 다른 대안을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늘 화가 나 있었고 곧바로 데이트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연인 사이 스킨십에 있어 적극적이지 못하고 능숙하지 못한 나에게 짜증을 냈던 경우도 여러 차례 있었다. (참고로 과거의 연인 A를 내가 만났던 가장 큰 이유가 매우 다정하고 자상한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당시에 내가 너무 어리고 멍청했던 건가. '내가 더 잘해주고 능숙해져야 할 텐데'라는 생각뿐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치욕스럽기까지 하다.
그와의 관계가 끊기던 그 날에도 '여름휴가' 문제를 가지고 전화도 아니고 심지어 메신저로 싸우고 있었다. 텍스트가 이어지다 보니 서로에 대한 오해가 점점 더 쌓여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도, 나도, 각자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그때부터 서로의 치부를 보여가며 싸움을 이어갔다. 결국은 평행선을 달리던 관계가 끝이 났다.
놀라운 점이 있다면, 나는 이후 만났던 다른 연인 B와 여름휴가 시즌 함께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부모님께 거짓말까지 해 가면서 홍콩을 다녀왔고 이 여행을 확정하기까지 B와 나는 아무런 다툼도, 서로의 밀고 당기기도, 그리고 기분 상함과 투정도 없었다.
B는 내게 정말 좋은 영향을 주는 연인이었다. '좋아한다'는 감정도 물론 존재했고, 인생의 선배 혹은 멘토 같은 역할을 자처했기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그와 소통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함께 있으면 더 좋은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여름휴가를 함께 보내는 것에 대해 내가 먼저 제안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우린 그때 홍콩의 유명한 관광지에 가서 사진을 찍고, 쇼핑도 했고, 비 오는 어느 저녁 분위기 좋은 맥주집에 가서 답답한 인생에 대해 한참을 얘기했었다. 아마 말하기 껄끄러운 가정사에 대한 이야기도 그 날 처음으로 나왔던 것 같다. 이야기의 주제는 다양했고, 화려한 야경 앞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그 시간과 장소에 완벽하게 동화됐다. 여행기간 내내 스킨십에 대한 압박이나 투정, 두려움 같은 건 없었다. 손을 잡고 싶으면 잡았고 각자의 시간이 필요했을 땐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었고 어깨에 기대고 싶으면 한참을 기대고 있었다. 여행을 다녀오면서 관계가 더욱 끈끈해지고 신뢰의 두께가 더욱 단단해진 케이스가 된 셈이다.
신뢰의 문제라고 포장하고 있지만, 단순히 과거의 A는 나와 인연이 아니었을 뿐이라고 마무리지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관계에 있어 서로를 얼마나 믿고 있느냐는 그와 별개로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이제야 확신하고 있다. 모호한 믿음을 가지고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큼 조심스럽고 답답한 것이 없다. 그렇게 조심스러운 관계는 언젠가 발을 헛디디고 잠시 삐끗하는 경우에 금이 가거나 산산조각이 나 깨질 수도 있는 거니까.
어쩌면 과거의 A가 내게 그렇게 행동했던걸 고마워해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신입사원이 되고 공채 선배들과 처음으로 맥주를 마시던 날, A는 굳이 긴 시간 전화 통화를 하면서 내게 얘기했었다.
"넌 남자 친구가 뭘 하는지 궁금해하지는 않고, 연락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퇴근하자마자 선배들 동기들과 모여 맥주를 마시는 게 중요한 사람이지. 너한테 나는 무슨 존재인 거니"
그 당시 나는 A를 무척이나 좋아했고 오랜 시간 함께 하고 싶은 인연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그는 그때부터 내게 믿음이란 게 없었던 것 같다. 다른 자리도 아니고, 신입사원이 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많은 선배들과 함께 친해지려고 모인 자리에서 하필 내게 모진 말을 해가면서 눈물 쏙 빼게 만들다니. 난 단지 A 너처럼, 그리고 다른 사람들처럼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뿐이었는데. 내가 본인을 좋아하는지 조차 부정하게 만들 만큼 나 역시 그에게 믿을 주지 못했던 거겠지.
과거의 상황과 대비되는 일은 B를 만난 이후 겪을 수 있었다. 어느 금요일, B와의 데이트 약속을 앞두고 갑작스러운 야근을 하게 되어 그에게 양해를 구하고 사무실에서 대충 빵을 먹어가며 선배들과 일을 마무리하기 바빴던 날이 있었다. 저녁 9시가 다 되어 퇴근하는 길, 그의 금요일을 망친 것 같은 미안함에 전화를 했다. 그런데 그는 생각보다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기 너희 회사 앞 편의점이야. 이리 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급히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그는 편의점 한 쪽 구석에서 핸드폰으로 야구경기를 보며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내가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야근하고 있을 것 같아 늦은 시간에라도 데리고 나가서 식사를 하리라는 마음으로 한없이 기다렸다고 한다. 올림픽대로를 타고 식당으로 이동하는 길, 그는 내가 느끼고 있을만한 갑작스러운 야근의 짜증에 대해 격하게 공감해주며, 그래도 중간에 핑계 대지 않고 선배들과 끝까지 마무리 잘하고 왔다며 칭찬해주는 B에게 나는 더욱 강력한 신뢰를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언제나 내 과거에서 미화되었던 A에 대한 내 감정이나 추억이 조금 더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방향으로 고쳐지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B와 함께하는 내 일상은 여전히 즐겁고, 의미 있고, 소중하다. 단단한 믿음은 우리의 관계를 더욱 가치있게 만들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