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이 신중한 연애를 추구했던 20대 초반의 기억
이사를 앞두고 짐 정리를 하다가 대학생 때의 유물들을 발견했다. 대학생 마케터 수료증, 인턴 수료증, 면접 확인서, 폴라로이드 사진들, 그리고 군대 갔던 남자 동기들과 주고받은 위문편지까지. 순식간에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물건들을 영접하고 나는 모든 것들을 하나씩 꺼냈다. 촌스러운 옷매무새, 뭐가 그리 즐거웠는지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 불침번을 서고 있는 와중에 정성스러운 글씨체로 빼곡하게 채운 스물한 살 군인의 편지까지. 내게도 이런 추억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빛바랜 순간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자연스럽게 그 당시 사랑에 대해 굉장히 소극적이었던 나의 태도에 대해 되짚어보게 됐다.
스무 살, 스물한 살.
이때쯤 모든 것이 능수능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조금 더 적극적이고, 용기 있고, 과감하게 많은 사람들을 만났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 같은 감정이 문득 생겼다. 그땐 그래도 될만한 나이였고 그럴만한 열정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의 연애는 지지부진했다. 다가오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쳐내기에 바빴고, 묘한 감정이 드는 사람도 생겼지만 쓸데없이 신중했다. 그땐 뭐가 그렇게 조심스러웠는지 모른다. 스무 살, 스물한 살의 연애는 한 없이 가벼울 수도 있는 건데 그 당시엔 모든 것이 완벽하고 싶었나 보다. 나의 감정과 상대방의 감정에 대한 밸런스의 집착, 아니면 내가 최선을 다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랄까. 그때 누군가를 만나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닌데 20대 초반의 연애는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고등학생 때부터 내 이상형은 가수 성시경이었다. 대학교에 가면 꼭 그런 사람과 연애를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학교 동아리에서 정말 성시경을 쏙 빼닮은 선배를 마주쳤다. 심지어 그는 나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나는 그와 연결되지 못했다. 차가운 여자처럼 나는 그를 차단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그가 나에게 다가온 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2학년이 되고 나서 친해진 학과 동기가 있었다. 그가 군대 가기 일주일 전 우연히 마주친 자리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대화를 나누고 나서 급속도로 친해졌다. 이후 그는 군대를 갔고, 다른 남자 동기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편지를 주고받았다. 제대 후 같이 영화관에 갔던 어느 날, 그는 영화를 보던 중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어찌할 줄 몰라 나는 그 자세로 멈춰있었는데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하지만 그 동기와도 연결되지 않았다. 신입생 때 친했던 내 친구와 3개월 정도 짧게 만났던 사람이었다는 게 걸렸고, 또 나에 대한 그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영화관에서의 그 스킨십이 싫지 않았다면, 쓸데없는 밀당 같은 건 집어치우고 그와 대화를 이어나가면서 그의 생각을 물어봤어야 했다. 혹시나 해피엔딩이 아니더라도 나는 무슨 액션이라도 취했어야 했다.
유난히 친하게 지냈던 후배도 있었다. 성격이 나와 비슷해서 둘이 만나면 말 수는 많지 않았지만 마음은 편했다. 벚꽃이 피면 옆 학교 캠퍼스에 가서 산책을 자주 했고, 어느 추운 겨울에도 테이크아웃 커피를 한 손에 들고 벤치에 앉아 대화를 이어나갔다. 학교와는 꽤 먼 곳에서 따로 저녁을 먹고 술 한잔을 마시며 좀 더 가까워진 듯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이후 후배의 연락에 잘 응답하지 않았다. 이러다가 연인 관계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김칫국이든 아니었든 갑자기 선을 그어버릴 필요는 없었다. 이미 좋은 관계였기 때문에 나의 감정 혹은 후배의 감정 변화는 시간을 두고 지켜보면 됐을 텐데, 예고도 없이 나는 한 발 물러섰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했던 첫 소개팅도 싱겁게 끝이 났다. 과 동기의 친구였는데 예상치 못하게 너-무 잘생겼었다. 소개팅 이후 그에게 몇 번의 연락이 왔지만 나는 단 한 번의 약속도 잡지 않았다. 이유는 지금 생각해도 정말 기가 막힌다. 그가 너무 잘생겼기 때문이었다. 의대생이었고 얼굴도 잘생겼으니 내가 그 옆에 있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게 그 당시 내가 가진 합당한 거절의 이유였다.
혈기왕성한 나이, 새로운 관계와 인연을 마주하게 되는 시기, 고등학생 때보다는 좀 더 자유로워진 시간과 장소, 관계를 이어 줄 수 있는 다양한 매개체가 존재하다 보니 대학 시절 여러 가지 종류의 썸이 존재했던 것 같다. 물론 그중엔 어찌어찌 타이밍이 좋아 잘 연결되어 연애라는 것을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대학생 때의 연애는 매우 서툴렀고 임팩트가 없었다. 아마도 관계가 너무 건조했던 것 같다.
나의 과도한 예민함, 신중함, 그리고 지하를 뚫고 내려가는 낮은 자존감 때문에 내 연애는 항상 건조했고, 활활 타오르지 않았다. 20대 초반의 연애라고 하기엔 재미가 없어도 너무 없는, 의미를 찾기도 버거운 만남과 관계를 간신히 이어가고만 있었다.
20대 초반의 누군가가 혹시 나에게 연애에 대해 조언을 구하려고 한다면, 무엇보다 나는 그저 불꽃이 타오를 수 있는 그 관계 자체에 집중하라고 얘기하고 싶다.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면 각각 색깔이 다른, 또 온도가 다른 연애를 경험하게 될 것이고, 혹 연애까지 가지 못하더라도 그 전 단계에서 느끼는 미완의 아쉬움이 있을 것이고, 언젠가는 상처를 받으면서 다음엔 내가 언제 어떤 사람 앞에서 조심스러워야 할지를 판단하게 될 수 있을 거다.
또 무엇보다 나 스스로를 더욱 아낀다면, 연애의 감정에도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20대 초반의 나는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것이 나를 아끼는 길이라고 생각했었다. 무엇이 맞고 틀린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가 그 당시 마주했던 상황들에 좀 더 솔직하고 자신감이 있어야 했다. 나를 낮추고 고개를 숙이고 모퉁이로 숨어버리는 건 나를 아끼는 게 아니라 어쩌면 그때에는 열정적이었던 나와 내 감정들을 조금씩 닳게 만드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20대 후반이 되어서 사랑이라는 감정에 더 많이 아파하고 더 많이 중심을 잃었던 것 같다.
사랑할 수 있는 열정이 있다면, 누구나 열렬히 사랑했으면 좋겠다. 많이 웃고 울고 아프고. 그렇게 만들어진 감정은 이후엔 언제 어디에서든 그 누구의 감정보다도 더 견고하고 단단하게 진정한 사랑을 마주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