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lie May 27. 2020

신기루 같은 첫사랑이 떠나가던 날

아름답게 떠나 보내는 과거의 추억 혹은 미련

대학 졸업반을 앞두고 만났던 남자 친구. 그와 함께 했던 그 당시는 모든 감정이 다 진심이었다. 이 전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이 사람과 함께하는 미래는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었다. 보통 첫 남자 친구 혹은 처음 좋아한 상대를 첫사랑이라고 일컫지만 나에게는 (아무것도 해당되지 않던) 그가 첫사랑 상대였다. '나중에 얼마나 괴로운 시간이 오려고 지금 이렇게 말도 안 될 정도로 행복한 걸까'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수준의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었던 시기의 상대였기 때문인 것 같다.


사계절이 무색할 정도로 내게는 온통 '봄'같은 날의 연속이었다. 간질간질한 가슴속의 짜릿함이 전해오는 설렘도 배웠다. 비슷한 취향의 음악을 들었고, 가끔씩 생기는 각자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두고 우리는 서로 비슷한 방식으로 위로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터라, '학생 식당' 밥으로 점심을 대신해가며, 기념일에 맞춰 좋은 선물을 사느라 고심하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렸기 때문에 가능했던 감정이었을 것 같다. 봄 같은 날의 연속이었을 뿐, 열정을 가득 담은 여름을 느껴보지도 못했던 건 사실이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곱고 아름답게 피어난 사랑이었고, 나는 그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이후 불타오를 어떤 과정에 대한 예측도 없었고 불안함을 느낄 틈 조차 없었다. 굳건하게 우리의 관계가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서로에게 마지막이 되었던 순간이 다가오자 우리의 믿음은 사라지고 함께 걷던 길은 이미 반쯤 갈라져 버렸다. 마지막 인사하는 순간마저도 우리는 어렸기 때문에 상대를 더 이해하지 못했고 배려하지 못했다. 인연이 아니었다기보다는, 어렸기 때문에 인연이 될 수 있는 조금은 고된 길을 피해 가려 했던 것 같다.


봄만 있을 것 같던 나에게 소리 없이 사계절이 몇 차례 지나갔다. 그리고 어느 해 여름, 숨 막히는 무더위를 간신히 이겨낸 후엔 첫사랑을 추억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지는 기념일이 생겼다. 내가 아닌 상대방에게.


그는 나와 헤어지고 만난 좋은 상대와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나와 그를 동시에 알고 지내던 지인이 그의 웨딩 사진에 댓글을 남기면서 그의 소식이 자연스럽게 내게도 업데이트된 거다. 그때 내 나이는 고작 스물여덟 살. 서른이 되기 전까진 결혼하고 싶지 않았던 내게 결혼이라는 것은 부러움 혹은 선망의 대상이 아니었다. 단지 그에게는 정말 결혼이라는 것이 중요했었구나 싶은 생각이 스치며 과거 나에게도 결혼이라는 것을 알게 모르게 종용해 왔던 그의 태도가 묘하게 머릿속에 얽혔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것도 잠시, 나는 당시 회사에서 소속팀이 바뀌면서 자연스레 업무가 늘어나고 어떻게 시간이 가는지도 모를 만큼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옛 연인의 결혼 소식에 놀라거나 낙담하거나 혹은 SNS에 노출된 웨딩사진을 보며 외모를 평가하는 그런 지저분한 농담을 하기엔 너무도 정신이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냈고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이 기념일이 찾아왔다.


그 날은 평소와 다르지 않은 출근길을 걸었다. 평소 타는 지하철 시간대에 맞춰 4-3 플랫폼에서 타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지하철에 타고나서는 평소 출근길에 듣던 재생목록을 플레이했고, 다가오는 주말을 위해 평소처럼 친구들과의 약속을 잡았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기한 내에 제출하지 못하는 것에 극도로 예민하던 나는 상사에게 양해를 구해 기획서 제출 기한을 연장했다. 몸이 좋지 않은가 싶어 따뜻한 차를 마셔보고, 잠이 덜 깼나 싶어 아메리카노는 두 잔을 마셔버렸다. 퇴근 시간이 되자 책상 위에 겹겹이 쌓인 종이컵, 어지럽게 놓인 출력물, 그리고 먹다 남은 과자 부스러기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제야 오늘 나의 하루가 평소와 같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집에 가는 길, 지하철 안에서는 촉촉해진 눈가에 괜히 인공눈물을 여러 차례 넣었다. 상대방의 기념일을 생각하니 슬프거나 아픈 게 아니고 후회가 밀려오는 것도 아니었는데, 주체할 수 없는 가슴 떨림에 잠이 쉽사리 오지 않았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 꽤 괜찮은 날들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던 시점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잠시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지금 내가 정말 괜찮은 시간 속에 있는 것이 맞는 걸까. 의심이 거듭되었지만 나는 평소의 나를 찾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사춘기 같은 외로움을 겪고 나서 며칠이 지나지 않아 나는 다시 즐거워졌다. 나는 그저 신기루 같은 첫사랑의 증발에 대한 서운함을 강렬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정확한 감정을 알 수 없었던 그때의 가슴 떨림도 아직 잊지 않았다. 누군가와의 아름다웠던 순간에 대한 마지막 배웅일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이전글 그깟 공놀이에 일희일비하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