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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Feb 26. 2024

엄마의 기억이 자리한 무릎 딱지

상처에 조금씩 새살이 돋는 중입니다.

한겨울 날씨도 아닌데, 가슴속까지 찬 바람이 들어오고, 가슴 한편이 찌르르하다. 잔뜩 웅크린 몸을 오른쪽 왼쪽 돌려가며 옆으로 눕는다. 물에 젖은 솜이불이 온몸을 누르고 있다. 특별히 무리하지도 않았고, 삼시 세끼 밥도 잘 챙겨 먹었지만,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나타나는 증상이다. 병원에 가서 명확한 증상을 이야기할 수도 없다. 


곧 엄마의 기일이다. 엄마를 떠나보낸 지 2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몸이 기억하는 듯, 몸이 아프다. 어쩌면 마음껏 엄마를 그리워하고 싶은 마음이 몸을 아프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지금 아픈 이유를 알고 있다고 해서, 감정이 조절되는 것은 아니다. 평소에는 매트리스에 등이 닿아야 잠이 들지만, 이런 때는 오른쪽 왼쪽 번갈아 몸을 돌려가며 누워야 잠이 든다. 아플 때마다 엄마가 안아줬던 기억 때문이다. 마음이 아픈 것인지 몸이 아픈 것인지 정확히 구별할 수 없지만, 몸을 일으킬 힘도 없어 연차를 내고 쉬기로 했다. 



“엄마가 좋아하는 붕어빵 사 왔어. 이거라도 좀 먹어봐. 내가 안아줄게.”

추울 날씨에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딸아이의 가슴팍에서 붕어빵 봉지가 나왔다. 눈치 빠른 딸아이는 혼자 차려 먹은 시리얼 그릇까지 설거지해놓고, 아껴두었던 500원짜리 동전 두 개로 붕어빵을 사서 달려왔다.

“사랑이는 좋겠다. 이런 엄마 있어서.”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엉뚱한 반응인가? 고맙다고 했어야지!’ 당황한 건 딸아이뿐만이 아니었다. 몸과 마음이 취약한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툭 튀어나온 뜬금없는 말에 미안함과 창피함이 몰려왔다. 


따뜻한 붕어빵을 내미는 딸아이의 손길에서 순간적으로 돌아가신 엄마가 떠올랐고, 아프고 힘들고 속상할 때, 사무치게 엄마가 보고 싶어 울었던 기억들이 울컥 올라왔다.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우는 내 모습이 서러워서 더 울부짖었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서러움을 애먼 딸아이에게 토해낸 것이다.

“엄마, 외할머니 보고 싶어서 그래?”

목덜미를 감싸 안은 그녀의 온기에, 두 눈에서는 엄마를 향한 그리움과 서러움이 조용히 녹아내렸다.     




『무릎 딱지』라는 그림책이 있다. 책은 “엄마가 오늘 아침에 죽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엄마의 죽음을 마주한 아이의 감정을 그려낸 책이다. 아이는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이며, 누구도 그것을 피해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슬픔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무릎 딱지』는 엄마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상처를 강렬하게 표현하고 싶어서인지, 표지부터 속지까지 온통 붉은색이다.


엄마의 죽음은 내 안에서도 짙은 붉은색 그림자였다. 그녀가 떠난 후 내 안은 텅 비었고, 가슴 저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원망과 분노가 마음을 찢어, 계속 검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삶의 이유였던 그녀를 한순간에 잃고, 삶의 의미도 잃었다. 시간이 멈추었기에 미래도 없었다. 어떤 목표도 없었고, 무엇인가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시간이 흘러, 불타는 화염처럼 나를 집어삼켰던 격렬한 감정들이 고요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몇 줄기의 불길이 조금씩 일어날 때가 있다.     




“젖은 수건 짜듯이 아빠를 꼭 짜면 온몸에서 눈물이 뚝뚝 쏟아질 거야.”

어린 주인공은 아빠의 괴로움을 느낀다. 자신도 힘든데 아빠까지 돌봐야 한다. 집에서 엄마 냄새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창문을 모두 닫는다. 엄마의 목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자신의 귀도 막고 엄마를 잊지 않으려고 눈도 감는다. 그러던 어느 날, 마당에서 넘어져 무릎에 상처가 났고, 그 순간 자신을 따뜻하게 불러주던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다.

“괜찮아, 우리 아들. 누가 우리 착한 아들을 아프게 해? 넌 씩씩하니까 뭐든지 이겨 낼 수 있단다.”

아픈 건 싫지만, 엄마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아이는 무릎에 딱지가 생기면 일부러 딱지를 떼며 상처를 낸다. 무릎 딱지는 아이가 엄마를 만나는 통로이다. 


아이가 무릎 딱지를 떼어 엄마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나는 종종 책을 통해 엄마를 만난다. 마음 깊숙한 곳의 그리움을 끄집어낼 수 있는 책을 일부러 찾아 읽는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엄마가 떠난 그날의 슬픔과 화남, 미안함과 죄책감, 원망과 후회, 그리고 외로움의 복합적인 감정을 마주한다. 가끔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하루 종일 침대 위에서 그녀를 만나기도 한다. 그녀의 향기와 웃음소리, 그녀가 만들어줬던 음식, 함께했던 장소들을 떠올리며 그리운 마음을 달랜다. 묻어두었던 그리움의 감정을 마음껏 꺼내고 나면,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평온함이 찾아온다.



어느 날, 아이의 할머니가 엄마는 무릎이 아니라, 가슴 안에서 언제까지나 함께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후 아이는 엄마를 만나기 위해 문을 닫거나 귀와 입을 막지 않게 된다. 더 이상 무릎 딱지를 뜯지 않자, 상처에 새 살이 돋는다. 마침내, 아이는 심장 위에 손을 포개 얹고 평온한 잠이 든다.  


무릎 딱지를 떼는 대신, 심장이 뛰는 것을 통해 엄마를 추억한다는 결말은 아이의 상처가 치유되었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아이가 보다 성숙한 방법으로 자신의 마음을 다독이며 살아가는 방법을 찾은 것이라 생각한다. 엄마의 죽음은 그렇게 빨리 치유되지 않는다. 아이는 가슴이 뛰는 것을 통해 엄마를 만나며, 의연하게 삶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의연한 삶 속에서도 여전히 혼자 지고 가는 아픔은 있다. 잊고 싶은 상처와 고통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이는 그리움의 감정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평생 다독이고 위로하며 삶을 이어갈 것이다.




“엄마... 엄마도 죽어?”

딸아이가 『무릎 딱지』를 읽고 물었다. 

“그럼~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다 죽으니까.”

“내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더라도, 여기서 엄마랑 아빠랑 함께했던 일들을 다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함께 했던 시간을 잊고 싶지 않다는 딸아이의 말에, 엄마를 향한 그리움에도 딱지가 앉았다. 딸아이의 작은 품에서 새살이 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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