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박이지만 행복합니다.
“언니, 오늘 사랑이 학교 입학식 안 와?”
“뭐? 입학식 10시 30분까지 아니야?”
“무슨 소리야. 9시 30까지야.”
이미 시계는 9시 50분을 지나고 있다. 전화를 끊자마자 다급하게 딸아이를 불렀다. 눈치 빠른 그녀는 새로 산 책가방을 어깨에 야무지게 멘 채, 방에서 뛰쳐 나온다. 5초만에 엘리베이터를 탔다.
“아직 안 끝났으니까, 지금 가도 괜찮아.”
미안함에 눈도 못 마주치고 있는 내 손을 잡으며 딸아이가 말했다.
늦게 도착한 학교 운동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차할 공간을 찾는 동안 딸아이는 아파트 옆 동에 사는 친구 엄마의 도움으로 교실을 찾아 들어갔다. 학교 첫 입학식인데 힘차게 손 한번 흔들어주지 못하고, 반짝이는 미소 한번 지어주지 못하고, 그렇게 정신없이 이웃 엄마의 손을 빌려 딸을 보냈다. 자괴감 휩싸여 다리에 힘이 풀린 채, 텅 빈 운동장 벤치에 털썩 주저 앉았다.
경쟁이 치열한 공립유치원에 합격하고도 등록일을 놓쳐서 입학시키지 못했고, 변경된 소풍일을 확인하지 못해 도시락 없이 소풍을 보냈다. 체험학습 당일 불편한 원피스를 입혀 보냈고, 일찍 하원하는 날을 깜박해 홀로 유치원에 늦게까지 남아 있게 했다. 다 맞혔다고 생각했던 예방접종도 4개나 빠뜨려서 입학 전에 부랴부랴 맞혔다. 평소 내 덜렁거리는 성격을 알고 있는 동네 엄마들은 사랑이를 안 잃어버리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말한다. 입학식만큼은 축구 경기장의 함성에 맞설 만큼의 열정으로 응원해 주고 싶었는데 그것마저 못 해줬다.
엄마로서의 내 어설픔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양육과정의 불완전성을 받아들인다고 하지만, 이번만큼은 굴욕감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딸아이를 처음 안았을 때 반드시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던 위대한 사랑은 수치심으로 바뀌었다. 수줍음이 많은 아이라, 뒤늦게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자신에게 집중되는 눈길을 견디기가 버거웠을 것이다. 첫 등교의 소중한 순간들을 천천히 음미할 수 없게 만든 엄마를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딸아이를 기다리는 1시간은 사막을 횡단하는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익숙한 음색의 학교 종소리가 울리자 고만고만한 키들의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들 틈에서 딸아이는 단번에 나를 찾아내고는 쏜살같이 달려온다. 그녀는 주변의 모든 것을 기쁨과 환함으로 밝히는 새벽 일출과 같은 미소를 짓고 있다.
“오늘 늦게 가서 괜찮았어? 엄마가 미안해.”
“아무렇지도 않았어. 나보다 더 늦게 온 친구도 한 명 있었어.”
그녀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책가방을 벗어 내 가슴팍에 던져놓고 구름사다리로 달려갔다.
진정한 의연함이란 이런 것일까.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뒷모습이다. 내가 예민했던 것인지 그녀가 무신경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녀는 이미 이런 상황에 자주 노출이 되어서 면역이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오전 내내 나를 짓누르던 무능함과 자괴감이 순식간에 안개처럼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녀의 손바닥만 한 작은 가슴은 내 연약함이 이해받는 안식처가 되어주기에 충분했다.
시멘트 사이의 틈에서도 새싹이 돋듯이 내 빈약한 토양 위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내 부족함의 자리만큼 더 자란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지난 일에 얽매이지 않는 아이, 준비물을 챙겨오지 못한 친구에게 선뜻 자기 것을 내어 주는 아이, 옷이 불편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즐길 줄 아는 아이, 깜박 병이 있는 엄마의 핸드폰을 미리 핸드백에 넣어두는 아이, 학교 사물함에 예비용 우산을 준비해 놓는 아이가 되었다.
단언컨대 이런 보물 같은 아이를 잃어버리는 일은 절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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