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박이지만 행복합니다.
“우리 엄마는 자기 책만 읽고, 저는 책 안 읽어줘요.”
놀이터에서 만난 친구 엄마의 물음에 딸아이는 단백한 대답을 남기고 싱싱이를 타고 달아났다.
“언니 책 그만 읽고, 애 책 좀 읽어줘.”
동네 엄마들은 박장대소에 포복절도다. 이게 그렇게 웃을 일인지 의문이다. 책을 읽는 시간은 나에게 소중한 시간이라 딸아이에게도 양보하지 않았다. 삶의 책임과 도전이 무겁고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좋은 책은 안전한 항구이자 피난처가 되어주었다. 삶의 어두운 시기의 등불이었고 외로운 시기의 포옹이었다. 나에게 책은 단순히 종이와 잉크가 아니라 위안과 에너지의 저장고이다. 그러나 이런 의미를 모르는 동네 엄마들에게 나는 그저 이기적인 엄마이다.
독박육 워킹맘으로서 적당히 이기적인 엄마로 살고 있고 꽤 만족한다. 이기적인 엄마가 된 이후로는 적어도 딸아이에게 ‘성격이 안 좋다’는 소리는 듣지 않게 되었다. 피곤에 찌들어 별일 아닌 일에 짜증을 낼 때면 딸아이는 엄마가 성격이 안 좋아지는 것 같다는 걱정스런 말을 하곤 했었다. 작정하고 이기적인 엄마가 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날의 경험은 내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했다.
“엄마, 나 배가 아파.”
“갑자기? 배 어디가, 어떻게 아파?”
걱정이 돼야 하는데, 화가 났다. 하필 왜 지금 와서 아프냐는 말도 안되는 짜증이 올라왔다. 일요일 밤 9시가 훨씬 넘은 시간이다. 업무와 일과가 우선되는 평일을 보상하기 위해 주말은 꼬박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한다. 놀아주기 임무다. 채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아빠의 공백을 메꿔보려 고군분투하다 보면, 겨우 씻고 침대에 누울 정도의 에너지만 남겨서 돌아온다. 하루 종일 힘을 뺀 딸아이는 잠들기 전 아빠를 그리워할 틈도 없이 잠이 든다. 그런데 갑자기 배가 아프단다.
“엄마가 마사지해 줄게.”
고작 10분 남짓이지만 진이 다 빠졌다.
“엄마, 그런데 배가 계속 아파.”
마사지 한 노력은 간데없이 딸아이는 더 고통스러워했다.
그 순간,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피로와 책임, 이따금 밀려오는 외로움에 짓눌렸던 감정의 수문이 터졌고, 더 이상 억누를 수가 없었다. 당황하는 딸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해. 사랑이 배가 아파서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하는데, 엄마가 너무 힘들어서 계속 눈물이 나. 사실 너무 힘들어.”
딸아이가 작고 부드러운 손으로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20년 전 마지막으로 안겼던 친정엄마 품처럼 따스했다.
“엄마, 울어도 괜찮아. 내가 아파서 미안해.”
딸아이의 뜨거운 눈물이 목 덜미에 떨어졌다.
“사랑아, 당장 병원 가자.”
초능력이 정말 있는 걸까. 근원을 알 수 없는 힘이 솟았다. 아이의 눈물은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무한한 사랑과 신뢰로 밀려와 내 지친 마음을 보듬어 주었다. 아파서 미안하다는 말의 순수함은 엄마로서의 부족함을 적나라하게 깨우치게 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단숨에 일어나 자동차 키와 카드를 챙기고 아이 손을 잡았다.
“아픈 건 미안한 게 아니야. 엄마가 부족해서 그래.”
아이는 응급실에서 진통 주사를 맞으며 고통을 덜 수 있었다. 간혹 아이들은 일시적으로 장의 일부분이 멈추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다행히 몇 시간 뒤 그녀는 다시 매 순간을 모험하는 까불이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나 자신의 컵에 물을 채우지 않으면 아이의 삶에 쏟아부을 충분한 사랑과 에너지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지속가능한 양육을 위해서 적당히 이기적인 엄마가 되기로 결심했다. 먼저, 육체적으로 지치지 않도록 에너지를 잘 분배해서 일정을 짜고 움직였다. 집에 돌아와 급하게 병원에 가야 하는 상황이라 해도, 왈칵 눈물이 쏟아질 일은 더 이상 없다. 정신적 에너지도 소진되지 않도록 시간을 정해서 매일 40분 정도 책을 읽는다. 눈치 빠른 딸아이는 조용히 옆에서 그림을 그리며 그 시간만큼은 나에게 말도 걸지 않는다. 자연스레 아이도 자기돌봄이 어떤 것인지 배워가는 듯하다.
내가 나를 돌보면서 더 인내심 있고 이해해주는 엄마가 되었다. 그런데 책을 안 읽어 주는 엄마라는 서운함 묻어있는 딸아이의 말이 자꾸 목에 걸렸다. 지속가능한 선에서 매주 토요일, 그녀가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그림책 하브루타를 시작했고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에너지가 남아 있는 평일이라면 주2회 정도 잠들기 전 책을 읽어주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자라고 있다.
< 사진출처: pixaba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