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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해지지 않는 이별

by 이음

모든 관계는 결국 이별을 향해 간다지만, 이곳은 유난히 이별이 잦다. 조선소 호황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지만, 불황이 닥치면 또 다른 기회를 찾아 떠난다. 출퇴근하는 인파로 북적이던 거리도, 경기가 안 좋아지면 금세 한산해진다. 그들이 떠난 자리는 자꾸 말을 걸고, 남겨진 자들은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자연스레 이별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관계를 시작했다. 나를 보호할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게 뜻대로 되던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모인 이곳에선, 마음을 지키는 일이 더 어렵다. 사람들은 결국 서로의 온기에 기대고, 마음의 거리도 점점 좁혀진다.


“영아야, 오빠 발령 났어. 경기도래.”

“진짜? 잘됐다! 엄마도 좋아하시겠네. 언제쯤 가?”

“다음 달에 갈 것 같아.”

“그렇게나 빨리?”

예정된 이별이었지만, ‘다음 달’이라는 말에 벌써부터 마음이 휑했다. 이곳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 그녀는 남편의 일 특성상, 몇 년 주기로 지역을 옮겨 다녀야 했다.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좋았겠지만, 이제라도 만난 것에 감사한 사람. 거제에 정을 붙이게 해준 고마운 인연. 끝을 알고도 우리는 절친이 되었다.


비슷한 가치관과 성향 덕분에 우리는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사소한 고민부터 중요한 선택까지, 생각하는 방식이 닮아 있었고, 일상에서 벌어지는 작은 사건들에도 반응이 비슷했다. 둘 다 길치라, 주차한 차를 못 찾아 헤매는 일은 기본이고, 같은 길에서 몇 번씩 헤매는 일도 다반사. 기차 시간을 엉뚱하게 예매하거나, 쇼핑한 물건을 두고 오는 것도 예사였다. ‘난 왜 이렇게 생겨 먹었을까?’ 자책하다가도, 서로를 보면 위로가 됐다. 내 부족함을 온전히 이해받는 느낌. 실수 뒤엔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찾았다. 물론, 해결책이라고 내놓을 만한 건 없었다.


마침내 친구를 보내야 할 순간이 왔다. 감정을 아껴두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이미 여러 번 이 순간을 그려왔기 때문일까. 예상과 달리, 마음이 무너지진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별을 준비해 왔던 것처럼. 어쩌면, 관계에 감정을 더 쏟을수록 오히려 이별이 더 쉬워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다 주지 못한 마음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만드니까.


때론 이별이 관계의 의미를 더 선명하게 하기도 한다. 그녀가 떠난 뒤, 함께 마셨던 커피 한 잔이 인생 최고의 커피로 남았다. 함께 나누던 소박한 식탁은 미슐랭 부럽지 않은 만찬이 되었다. 함께 듣던 노래가 플레이리스트가 되고, 함께 걷던 길은 은하수 길이 되었다. 어쩌면 이별은 나 자신을 기억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남편 있는 데로 가야 될 것 같다.”

“왜? 경기 좀 나아지면, 형부 다시 오는 거 아니었나?”

“지금 있는 데가, 돈도 더 많이 주고, 일도 덜 힘들고. 여기로 안 오고 싶단다.”

“여기서 15년 넘게 일했는데도? 부모님도 여기 계시잖아.”

“연봉 사천도 못 받았잖아. 지금 있는 데는 두 배다.”

“.... 그럼 가야지.”

15년간 한자리를 지키며 쌓아온 기술과 경험의 보상이 고작 연봉 4천이라니. 붙잡을 수 없었다. 경기가 좋을 때는 야근과 주말 근무로 그나마 생활을 유지하지만, 경기가 나빠지면 생계가 버거워진다. 거제에서 처음으로 마음을 터놓았던 언니도, 그렇게 떠났다.


떠난 자리는 값싼 외국인 노동자들이 채우고, 남아 있는 사람들 역시 떠나야 할지, 버텨야 할지 갈팡질팡이다. 정착한 삶을 떠나기엔 현실적인 문제와 감정적인 미련이 남는다. 경기가 나아질 거라는 보장도 없으니, 계속 버티는 게 맞는지 막막하다. 떠난다고 해서 더 나아질 거라는 확신도 없다. 겨우 오늘의 희망에 기대어 살고 있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불안하다. 떠나는 이들이 부럽기도 하고, 그동안 흘린 땀과 지나온 세월을 생각하니, 마음 밑기둥이 서글프게 내려앉는다.


배우자의 직장 문제, 더 나은 일자리, 자녀 교육, 이곳 생활이 맞지 않아서... 떠나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새로운 곳으로 향하지만,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은 한동안 어디로도 향하지 못한다. 한 주의 스케줄을 공유하고, 그날의 저녁 반찬이 뭔지도 알며, 기분에 따라 어떤 커피를 마시는지도 기억하는 사람들과의 이별. 마음은 휘청거거릴 수 밖에. 영화나 드라마의 이별 장면에서, 남겨진 사람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이유를 알겠다.


헤어짐이 숙명이라지만, 익숙해지는 건 아니었다. 이별이 쌓인다고 해서, 무뎌지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 감정을 다루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는 것. 단단히 껴안기보다는, 한 걸음 물러서서 그 감정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 조금씩 다른 얼굴로 찾아오는 이별을 평생 배우며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망고 보냈어. 제주도 갔는데, 망고 보자마자 다온이 얼굴이 딱!”

“일본 갔다가 이 빵 때문에, 눌러 살 뻔! 이건 꼭 먹어봐야 돼. 저녁쯤 도착할 거야.”

“시댁 언제 가? 이번에 부산 가는데, 일정 맞춰서 얼굴 보자.”


서로의 흔적을 되새기는 일. 이별이 영원한 단절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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