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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곳이 아프다.

by 이음

“옛날 어느 마을에 형제가 살았어. 어느 날, 동생이 요술 맷돌을 얻게 됐는데, 욕심 많은 형이 그걸 훔쳐서 바다로 도망가 버린 거야. 거기서 소금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멈추는 법을 몰랐던 거지. 결국 소금이 넘쳐흐르면서 배는 가라앉고 말았어. 지금도 그 맷돌은 바닷속에서 소금을 만들고 있대. 그래서 바닷물이 짠 거래.”

어릴 적, 엄마가 읽어 준 전래 동화 ‘요술 맷돌’ 이야기다. 권선징악, 과유불급 같은 교훈도 담겨 있고, 제법 그럴듯한 얘기이기도 했지만, 그보단 엄마의 따뜻한 품과 나지막한 목소리가 좋아서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바다를 볼 때마다, 바다 밑에서 여전히 쉼 없이 돌아가는 맷돌을 떠올렸다.


이곳에 온 뒤로는 더 이상 맷돌이 떠오르지 않는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아이들 학비를 위해, 병든 부모를 돌보기 위해, 작은 가게를 차리겠다는 꿈을 위해 흘린 땀방울들이 모여 바다가 되었으니까. 퇴근 후, 거칠게 피곤이 묻은 남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일면식도 없는 무수한 얼굴들이 겹쳐 지나갔다. 집 앞 베란다 너머로 바다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소금물에 절여지는 듯했다.


“회사 사람 중에 혼자 와서 일하는 사람들 많제?”

“반 이상이 혼자 와 있지.”

“한번 집에 초대해라. 삼계탕 같은 건 별로 안 힘들거든.”

마음의 짠 기운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심산이었다.


“아이고, 제수씨, 이래 우르르 와도 괜찮나 모르겠습니더.”

대충 물만 튕겨냈을 것 같은 새까만 얼굴들 사이로, 은은한 비누 냄새가 풍겼다. 빗질까지 한 모양이다.

“별거 없어요. 가끔 이렇게 얼굴 보는 거지요.”

요리에 큰 기대를 하지 않도록 미리 포석을 깔았다.


다행히 음식이 입에 맞는 모양이다. 하긴, 온종일 몸을 쓰고도 밥을 깨작거리는 게 더 이상하다. 젓가락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하나둘씩 걸리적거리는 작업복 소매를 걷어 올린다. 발그레한 귀 옆으로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살짝 어깨를 들어 닦아낸다. 걷어 올린 소매 사이로 거뭇거뭇한 상처들이 드러났다. 앉을 때 당겨 올라간 바지 자락과 반쯤 내려간 양말 사이로 드러난 다리. 거기에도 비슷한 상처들이 보인다. 세월의 증표처럼. 남편에게 ‘조심하라’며 다그쳤던 게, 참 얕은 소리였구나 싶어 가슴이 뻐근했다. ‘무심했던 내 잔소리가 더 상처가 되진 않았을까?’ 입안에서 밥알이 맴돌았다.


“재범 씨, 여자 친구도 잘 지내죠? 그때 보니까 참 예쁘던데.”

올라가 있던 그의 입꼬리가 잠시 멈췄다. 아차! 밥알이나 계속 굴릴걸. 괜히 분위기 살리려다...

“헤어졌어요. 홀어머니 모시는 남자한테 시집올라 카겠습니꺼.”

그 얘기만은 아니길 바랐는데. 역시나. 내 입을 묶어놨어야 했다.

“죄송해요. 제가 괜한 말을... 인연이 아니었던 거죠.”

‘나쁜 년!’이라며 시원하게 욕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또다시 실수할까, 최대한 말을 아끼기로 했다. 사실 그 여자 마음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냥 이제는 안 만나고 싶네예.”

서른 살.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이 넘치는 나이.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많겠지만, 그의 세상에선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책임감이 언제나 먼저다. 떠나간 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끝난 후의 빈자리를 달래는 일보다도.


또래보다 성숙하고, 배려가 몸에 배어 있는 남자. 회사 형들 사이에서도 동생 노릇을 톡톡히 해내는 청년. 몸이 부서져라 일해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건 얼마 없지만, 어머니를 모실 수 있음에 감사하다는 어른. 급한 생계 앞에서, 꿈도, 연애도, 취미도 내려놓은 그의 구부정한 어깨가, 자꾸 눈에 얹혔다.


“참, 동균 씨, 허리 다친 건 좀 어때요? 너무 빨리 복직한 거 아니에요?”

“인자, 괜찮습니더. 살살 편한 것만 하고 있습니더.”

현장에서 몸을 쓰는 일이다 보니, 동료들에게 피해가 갈까 싶어, 다 낫지도 않은 몸으로 복직했다고 들었다. 그 마음을 아는 동료들은 그의 일을 나눠 맡아 돕고 있었다. 남편이 연차도 쓰지 않고 아픈 몸으로 출근하는 걸 보며, 미련하다며 화를 낸 적이 있다. 그 자리엔 나만 빼고 다 미련한 사람들만 있었다. 그 미련함이 서로를 버티게 한 힘이었다.


마무리는 차가운 맥주 한 캔씩. 오늘의 수고를 한 방에 보상받은 듯, 더 바랄 게 없다는 표정으로 들이킨다. 맥주 캔을 감싼 손바닥의 도톰하고 울퉁불퉁한 선들이 닮았다. 오랜 세월 굳어진 딱딱한 결. 익숙해진 고단함의 무늬이자, 견뎌온 시간의 흔적. 그 속엔 여전히 여리고 다치기 쉬운 속살이 숨어 있을 테지. 마치 작업복 소매를 걷어야 보이는 상처들처럼. 단단한 살이 자리 잡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버텨온 걸까. 나는 이곳이 아프다.


배를 걷고 잠든 남편의 잠옷 바지를 슬며시 올려 본다. 허술한 샤워로는 지워지지 않은, 고된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하나, 둘, 철판에 긁히고 찍힌 흉터들을 세어 보고, 언제 생겼는지 모를 멍 자국을 어루만진다. 마른 가죽처럼 거칠어진 손바닥을 조심스레 문지른다. 늙은 나뭇결 같은 이마를 천천히 쓸어내린다.


삐그덕삐그덕. 녹슨 기계처럼 뻣뻣해진 그의 몸이 이리저리 뒤척인다. 이제 그만하라는 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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