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시 이번에도 돈이 안 되는 일을 시작했다. 글을 쓰는 일이다. 만약 누군가 “왜 글을 써?”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쓰지 않을 수가 없어서.”
낯선 곳에서 나를 재정의하는 일이 고단했을까. 내 안의 소리를 꺼내고 싶었을까. 아니면 마흔이 되어서야 삶을 돌아볼 필요성을 느꼈던 걸까. 모든 이유가 뒤엉켜 있었다. 복잡한 문제를 풀고 싶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심지어 무엇부터 풀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정리되지 않은 채 계속 쌓여가는 생각과 감정들에, 마음은 점점 더 복잡하고 어지러웠다. 무질서하게 흩어진 세탁물이 산더미처럼 쌓인 것 같았다. 양말 한 켤레를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었다. 대충 살고 싶지 않았다. 정리가 필요했다.
산을 탈까, 명상을 배울까, 여행을 떠나볼까? 잠깐은 숨통이 트일지도 모르지만, 결국엔 나를 만나야만 한다.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잠시 가라앉은 것처럼 보여도,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얼굴을 내민다. 미룬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나와 정면으로 맞서는 방법으로 글쓰기만 한 게 없다.
사실, 커피 한 잔도 마음대로 마시지 못하는 독박육 맘에겐 등산, 명상, 여행은 그저 허황된 꿈이다. 시간도 문제지만, 준비물도 산더미. 등산복, 등산화, 이동비, 숙박비... 다 합치면 몇십만 원은 기본이다. ‘그 돈이면 애 먹을 거나 사지.’ 그런데 글쓰기는 노트북 하나면 끝. 내가 원하는 시간,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언제든지 쓸 수 있다. 아이가 잠든 틈을 타서, 혹은 밀린 빨래 더미를 앞에 두고서도, 글을 쓸 수 있다. 손에 쥘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무엇보다 글쓰기는 ‘나’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 끌렸다. 내 안의 감정을 꺼내 놓고, 그걸 누군가와 나누는 일. 마음을 나누면, 혼자 싸우지 않아도 되는 기분이 든다. ‘나’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니.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노트북을 열었다.
결심했다고 해서, 바로 글이 써지는 건 아니었다. 빈 페이지 앞에 앉으면, 머리가 하얘진다. 화면 속, 커서가 깜빡일 때마다 심장도 함께 쿵쾅거린다. 길어지는 기다림에, 커서는 ‘어쩌라고?’라며 날카롭게 나를 째려본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머릿속은 대 환장 파티다. 생각들이 서로 부딪히고, 뒤엉켜서 엉망진창이다. 손끝은 키보드 위에서 얼어붙은 지 오래다.
그래, 일단 손을 움직여보자. 뭐라도 써보자. “오늘은, 햇살이 방안을 가득 채울 때쯤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침대에서 나오기 싫어 뭉그적대다가, 커피 한 잔의 유혹에 몸을 일으켰고...” ‘와, 이건 아니다.’ 의미를 잃은 단어들이 모니터 위를 굴러다니고, 논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들이 엉뚱하게 날뛴다. 상상했던 의미들은 공중에 흩어져 사라지고, 내 의도는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 글은 계속해서 눈앞에서 비틀거린다. 쓰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내가 말하려는 것과 손끝에서 나오는 말들이 도무지 일치하지 않는다. 지우고, 다시 쓰고, 다시 지우고. 매번 내 비루한 표현력과 상상력의 한계를 마주하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왜 시작했나 싶다. 내 속에 있는 말들이 서로 맞닿지 않아서, 계속해서 그사이를 부여잡고 끄집어내려 애쓴다. 여러 색이 섞인 물감에서, 원래의 색을 찾아내는 것 같다. 외국어도 아닌데, 내 마음을 언어로 바꾸는 일이 이렇게 골치 아플 줄이야. 이쯤 되면 글이 나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내가 글을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길 잃은 미로 속에서 다시 돌아갈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상황이다.
글이 내 마음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 같지만, 손끝은 끈질기게 키보드를 두드린다. 다듬어지지 않은 단어들이 하나둘씩 화면에 떠오른다. 생뚱맞던 단어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손을 잡고, 문장으로 변해간다. 앞 문장이 뒤를 끌어주고, 뒤 문장은 또 다른 문장을 이끌며, 삐걱거리던 문장들도 조금씩 질서를 찾는다. 점점 마음과 문장이 닮아가기 시작하고, 그 사이로 어지럽던 마음도 서서히 정리된다. 흩어져 있던 별들이 하나씩 이어지듯, 문장들이 이어져 하나의 별자리가 된다. 내 이야기를 품은 별자리는 하늘을 가로질러 반짝인다.
뾰족하지 않은 생각, 엉뚱하게 얽힌 문장, 미숙한 표현들. 누군가는 내 글이 ‘쓸만한 글’이 아니라고 할지도 모른다. 나 역시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이제 막 글을 쓰기 시작한 내가, 내 글을 좋아해 주고, 공감해 주는 사람이 많길 바라는 마음은 지나친 욕심이다. 사실 내 남편도 내 글을 읽지 않는다. 글을 쓴다고 해서 내 인생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거란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쓴다. 이 ‘쓸만하지 않은 글’이 ‘나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걸어온 길, 내가 느낀 감정, 내가 던진 질문들이 담겨있다. 불완전한 초상화라도, 분명 내 눈빛, 내 표정, 내 숨소리가 스며있다. 화려하고 정교하지 않은, 삐뚤빼뚤한 초상화가 지금의 나일 뿐이다. 쓰다 보면, 언젠가는 진짜 나를 그릴 수 있는 날이 오겠지.
그냥 쓴다. 내 마음을 마주하는 용기, 어설픈 글을 드러내는 용기, 그리고 다시 써 내려갈 용기. 쓸만하지 않아도 쓸 말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