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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을 힘껏 만나볼게.

by 이음

이곳에서의 삶은 잎을 모두 떨군 겨울나무를 닮았다. 한낮의 햇살 아래 홀로 서 있는 나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단순한 선들만 남았다. 한여름의 짙푸름이 사라진 지 오래. 화려하지도, 번잡하지도 않다. 가지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 소리만 들린다. 감춰야 할 것도, 드러낼 것도 없는 삶. 낯선 고요함 속에서 나무는 느리게 자란다. 가지 끝에서 작은 싹들이 움트기 시작한다. 보이지 않을 만큼 작고, 느릴 뿐. 나무는 이미 다음 계절을 품고 있다. 한 번도 서두르지 않으면서.


바다가 천천히 얼굴을 바꾼다는 것을 배운 곳. 비 오는 날, 공기 중에 섞인 흙과 물의 냄새를 느끼게 해준 곳. 해가 뜨고 질 때마다, 하늘이 얼마나 다른 표정을 짓는지 보여준 곳. 이곳에서 나는 비워졌고, 또 채워졌다.


며칠 뒤면 이곳을 떠나야 한다. 떠나야 할지 머물러야 할지, 그간 이어져 온 마음의 줄다리기도 드디어 끝이 났다. 짐을 싸며 떠날 준비를 하지만, 떠나지 못할 추억들이 자꾸 그 자리에 몸을 뉜다. 새로운 시작을 향한 설렘보다, 이곳에서의 기억을 더듬는 아련함이 마음을 덮는다.


언제부터였을까. ‘남편 때문에’ 떠밀리듯 온 곳이, ‘남편 덕분에’ 올 수 있었던 곳으로 바뀌기 시작한 게. 그리고 어느덧 ‘내가 선택한 곳’이 된 게. 어쩌면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이곳이 나를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제는 자주 가지 못했던, 한적한 거리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밥보다는 이곳의 구석구석을 오래도록 곱씹었다. 지나쳤던 거리, 눈여겨보지 않았던 작은 골목들을 마음에 담았다. ‘언제 또 만날지 몰라.’ 더 멀리까지 가고 싶었다. 커피는 식당에서 한 시간쯤 더 가야 하는, 지도상 정 반대편에 있는 곳에서 마시기로 했다. 드문드문 보이는 낯익은 간판과 오래된 가로등, 빈 거리의 풍경은 흐릿해진 기억의 조각들을 불러냈다. 마지막까지 눈에 담고 싶은 풍경과 추억들을 끌어안으며, 한 모금씩 커피를 삼킬 때마다, 기억도 내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맞다! 견우직녀 등대한테도 인사하고 가야지.”

딸아이는 오래된 친구에게 인사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한여름 밤의 기억이 가득 묻어 있는 그곳으로 갔다.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기 전, 바다는 느긋하게 숨을 고르고 있었다. 검푸른색이 짙어지는 하늘 아래,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는 견우와 직녀처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애틋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닿을 듯 말 듯, 그저 바라만 보는 두 등대 사이에서, 딸아이는 사랑의 다리처럼 싱싱이를 타고 오갔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말없이 그들 사이로 내려앉은 밤의 여운을 만지는 그녀의 눈빛은, 기억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다.


언젠가는 이렇게 이곳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홀로 계신 아버지와 쇠약해지는 시부모님,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딸아이. 그들을 생각하면 계속 여기에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면, 이곳의 바람 한 점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리움은 떠나기 전부터 시작된다고 했던 걸까? 아직 오지 않은 시간 앞에서, 나는 벌써 이곳을 그리워하고 있다.

떠난다는 건 무언가를 남겨두는 일이기도 하고, 무언가를 가져가는 일이기도 하다. 이곳을 떠나는 게 두려운 건, 이 순간을 온전히 가져갈 수 없을까 봐서겠지. 손끝에서 미끄러지는 물처럼, 하늘로 흩어지는 연기처럼, 흔적 없이 흩어져버릴까 봐.


이 순간을 힘껏 만나려 한다. 잎을 모두 잃은 가지 사이로 햇살이 스며든다. 한여름엔 나뭇잎 뒤에 감춰져 있던 빛. 지금은 내 껍질 위로 살포시 내려와 살 속 깊숙이 파고든다. 나뭇잎을 통과하던 바람이 이제는 가지와 줄기를 그대로 스친다. 껍질 위를 가로지르며, 내 속을 다 들여다보는 듯 천천히 지나간다. 가지 끝에 닿는 빗방울. 천천히 뿌리까지 흘러가는 것을 느낀다. 이곳의 빛과 바람, 비. 모든 것을 내 안에 새긴다.


글을 쓰는 동안 여러 번 멈췄다. 머릿속을 떠다니던 생각들이 손끝으로 내려오지 않을 때가 있었다. 바다 아래로 가라앉은 것 같은 단어들을 찾기 위해, 숨을 고르고 밑바닥까지 잠수해야 했다. 그곳엔 오래된 기억들이 있었다. 때로는 따뜻했고, 때로는 날카로웠던. 지나쳤거나, 아니면 일부러 닫아 두었던 기억들. 조용히 손을 뻗어, 기억의 문을 하나둘 두드리며 그 안으로 들어갔다. 먼지 쌓인 풍경, 잊혀진 목소리, 무뎌진 감정들. 문을 열 때마다 그 기억들이 천천히 깨어났다. 내가 꺼내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엉성한 글을 세상에 내놓으려니, 녹슨 경첩이 삐걱대는 오래된 문을 여는 기분이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망설여지고, 손을 뻗는 순간에도 머뭇거린다. 문을 열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낡고 바랜 표면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조심스레 문을 밀어본다. 누군가의 긴 날들 끝에 작은 불빛이 되기를 바라며.


훗, 내일부터는 버터구이 오징어와도 안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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