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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초보 강의도 필요하다면

by 이음

“그림책 좀 알제? 어르신들 모시고 그림책 보면서, 죽음에 관해서 얘기 좀 해볼라 하는데, 한 시간만 부탁하께.”

“뭐라노? 어르신들 강의는 한 번도 안 해봤다. 그라고, 새파랗게 젊은 게 죽음 얘기를 우찌 한단 말이고?”

“애들한테 하던 대로 하면 된다. 그림책이니까, 가볍게 풀어가면 되지.”

“아, 진짜 못한다. 딴 사람 구해라.”

“어르신들 청춘 사진 찍어주는 프로그램인데, 기다리는 동안 가볍게 하는 거라, 강사료도 없다. 공짜로 부탁할 사람이 니 밖에 더 있나?”

“....”

하는 수 없이, 도서관에서 그림책을 뒤적였다.


죽음에 대해 가볍고 편안하게 풀어낸 그림책들을 몇 권 골랐다. 산다는 것 자체가 깊고 복잡하지 않은가. 긴 여정을 걸어오신 분들께 굳이 무거운 생각까지 얹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 죽음을 심도 있게 다룰 수 있는 삶의 깊이와 경험이 내게는 없었다.


선택한 책은, 삶과 죽음이 처음부터 하나였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나는 죽음이에요』, 죽음을 설레고 편안한 여행으로 표현한 『여행 가는 날』, 살아 있음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게 하는 『백만 번 산 고양이』였다. 지루해하시지 않도록 간단한 활동도 준비하고, 웃겨드릴 재미있는 문구들도 찾았다. 강의 시작 전, 분위기를 띄우려고, 임영웅 씨의 노래를 수십 번도 더 들었다.


긴장 반, 걱정 반으로 주민센터 단상에 올랐다. 인사를 건네며 어르신들과 눈을 마주한 순간, 가슴 한복판에서부터 뜨거운 설움이 솟구쳤다. 세월에 닳고 깎여 금이 간 얼굴들이 말없이 울고 있었다. 희로애락을 품은 손끝엔 말하지 못한 사연이 배어있었다. 눈물로 반짝이는 눈동자는 저마다의 묵직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었다. 모두가 살아 있는 이야기꾼이었다.


내가 가진 모든 에너지와 흥을 쏟아 이 시간을 채우겠다고 다짐했다. 다행히도 어르신들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큰 소리로 읽고, 질문에도 적극적으로 답하며, 청년들보다 더 뜨겁고 활기차게 참여해 주었다.


강의 후, 마음에 떠오르는 메시지나 버킷리스트를 적을 수 있도록 캘리그래피 액자를 준비했다.

“선생님이 대신 좀 적어주믄 안 되겠나?”

아차! 글을 모르는 분들도 계실 수 있단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럼요, 밤새 글씨 연습했는데, 아무도 안 써달라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잖아요.”

죄송한 마음을 감추며 정성껏 써드리자, 여기저기서 대신 써달라는 요청이 쏟아졌다.

“나는 힘들어서 못 살겠다고 써도.”

“아이고~ 우리 어머님하고 똑같이 말씀하시네.”

‘힘들어도 살자.’라고 적어 드리니, 내 눈을 보시며 활짝 웃으셨다. 아들 자랑을 늘어놓으셨던 할머니께는 ‘아들아, 용돈 넉넉히.’라고 써드렸다. 속마음을 들켰다는 듯 깔깔 웃으셨다.


강의가 끝난 뒤에는 ‘청춘 사진 찍기’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어르신들을 도왔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말동무가 되어 드리고, 사진 촬영 후엔 소지품을 잊지 않도록 챙겨드렸다.

“선생님, 내 좀 도와도.”

강의 내내 생글생글 웃으셨던 B 할머니가 다짜고짜 손을 잡아끌며 화장실로 가신다. 거기서 나는 씩씩하게 잘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나는 이게 마지막 사진일 것도 같아서...”

그러고는 한복을 꺼내시는 게 아닌가. 불쑥 솟는 눈물을 얼른 훔쳐내려 했지만, 이미 다 들킨 뒤였다.

“울지 마라. 나는 죽는 연습 많이 해서 괜찮다.”

“죽는 연습을 어찌하신다고요?”

“낮잠 엄~청 많이 잔다.”


그야말로 울다가 웃었다. 담담히 죽음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말에서 진한 세월의 깊이가 묻어났다. 다가올 마지막을 준비하며 내뱉은 짧은 한마디는, 내가 몇 시간 동안 공들여 준비한 메시지보다 훨씬 강렬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고도, 다시 살아내야 했던 시간. 그녀는 이미 충분히 경험하고 있었다. 삶과 죽음은 처음부터 언제나 함께였단 걸.


홀로되신 아빠 얼굴이 떠올랐다. 엄마가 하늘로 떠난 지 20년. 자식들 앞에서는 늘 강한 척하셨지만, 그의 외로움은 늘 어딘가의 틈으로 새어 나왔다. 그를 보면, 깜깜한 밤바다에 홀로 떠 있는 등대가 떠올랐다. 삶의 폭풍을 묵묵히 견디며, 내가 인생의 바다에서 길을 잃고 표류할 때마다 안전한 해안으로 이끌어 주던 쓸쓸한 빛. 외로움은 감출 수 없는 것임을, 그를 보며 알았다.


언젠가는 그 빛이 꺼지는 날이 올 테지.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남기고 싶은 말은 없는지, 어떤 치료를 받고 싶은지 물어야 하지만, 막상 말을 꺼낼 용기도 기술도 없어, 외면하고 있다. 죽음을 용기 있게 직면해야 한다고 외쳤지만, 사실 그 공간에서 제일 겁쟁이는 나였다.


순간순간 뭉클했던 마음과 삶에 대한 수많은 생각이 뒤엉켰던 긴 하루였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복잡한 심경을 씻어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뜻깊은 경험이었지만, 삶의 내공이 더 필요하다는 걸 실감했다. 두 번은 못 할 것 같았다.


마지막 인사를 하며 강의실을 나오려는데, 한 할머니가 내 손을 꼭 잡으셨다.

“정권 바뀌고 나서, 대통령이 이런 거 해주는 거 처음이다. 선생님, 고맙데이.”

‘흔들리지 마!’ 다짐하며 도망치듯 주민센터를 빠져나오려는 찰나. 또 다른 분이 길을 막았다.

“선생님, 내는 국민학교도 못 나왔는데, 오늘은 학생 된 거 같아서 좋았다.”

‘정신 차려!’ 애써 마음을 다잡았지만, 이번엔 타격이 좀 있었다. 가슴 한쪽이 찌르르 울렸다.


결국, 가끔 그림책 강의를 이어가고 있다. 그것도 강사료까지 받으면서. 참, 결정적으로 내 마음을 돌려놓은 건, 이 한마디였다.

“선생님, 그림책은 글자 몰라도 볼 수 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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