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재배치
침잠의 시간이 마음을 가르고
무기력과 오랜 시간 싸우다 보면,
무너져 가는 마음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힘든 순간이 있다.
그것은 아무런 손쓸 도리 없이,
멈춰 서 있는 나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을 때이다.
막막한 길 위에서 스스로를 다독이고
때로는 채찍질해 보아도,
마음은 오랜 시간 손끝에 박힌
굳은살처럼 단단하기만 하다.
그 무엇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렇다고 내보내지도 못하는 먹먹한 시간들.
이러한 시간은 피할 수도, 건너뛸 수도 없이
그저 나 혼자 온전히 떠안은 채
지나가야만 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그 터널을 눈이 먼 채 걷다 보면,
아득한 끝에서 아주 작은 불씨 하나가
아른거리는 순간이 온다.
그 불씨는 마음의 굳은살 아래를 깊이 파고들어
연기처럼 형체 없이 몸 구석구석을 스며들며,
이내 의식의 벽을 조용히 두드린다.
아주 미세한 파동, 그러나 선명한 신호.
그렇게 잠자고 있던 감각이
조심스럽게 깨어난다.
그리고 이 긴 회복의 끝자락에서,
가장 낯설고도 독특한 지점에 다다른다.
그것은 바로, 정렬감각이다.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지만
더 이상 도망치고 싶지 않을 때,
정렬감각은 조용히 찾아와 나를 깨운다.
다 타버린 마음에 남은 재와
단단하게 굳어 있던 감각이
마침내 그 불씨와 부딪히며
이렇게 말한다.
거의 다 왔어, 이제는 조금 덜 아파도 돼.
굳어 있던 감정의 밑바닥에서부터
새로운 세포를 틔워 내고
그것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정해주지 않지만,
그저 다시 나로 돌아갈 수 있는 안내장을 건네줄 뿐이다.
회복과 붕괴, 그 어느 쪽도 아닌 채로.
회복탄력성이 장작을 태우는 뜨거운 불길이라면,
정렬감각은 불씨와 나무 사이를 오가는 ‘숨’과 같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공기의 흐름.
“나 이제 거기로 가도 될까?”라고 물으면
정렬감각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건 네 선택이야.”
몸과 마음은 아직 불안 속에 머물러 있어도
머리는 이미 방향을 알고 있는 상태.
공허함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더 이상 그 순간이 하찮지 않다.
삶에서 도망치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다시 재배치하고
다잡고 싶어지는 고요하지만 강렬한 욕구다.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해 온 사람들은
위로 한 점 없이 메마르고 얼어붙은 시간과
누구보다 자주 마주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그 막막한 '감당'의 무게를
‘나를 위한 책임’으로 바꿔낼 수 있는 지름길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흐트러졌던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이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와 위치를
스스로 찾아가는 그 과정.
그것은 분명 치열한 일이지만,
그 무엇보다 매력적인 정돈의 시간이다.
육체는 비록 지쳐 있으나
정신에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순간.
일상의 기준이 비로소 다시 세워지고,
몸과 생각이 천천히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이 방향으로 가도 무리는 아니겠다 싶은 작은 확신.
그렇게 정렬감각은 우리에게 이제 살았다는 환희 대신,
이제는 조금 홀가분하다는 고요한 안도를 건네준다.
그렇게 조용한 숨의 정렬이 나를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뒤틀리게 하지 않도록,
무너진 중심을 다시 일으켜 세워준다.
우울과 번아웃이 무서운 진짜 이유는
'왜 이렇게 아픈지'그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정체를 모르는 통증은 이내 공포가 되고,
그 공포는 다시 나를 잠식해 온다.
하지만 나의 본질과 지금의 상태를 차분히 마주하며
나아가야 할 이유를 하나씩 짚어낼 때,
오랜 시간 쌓여온 고통의 불순물을 걷어내고 토해내며,
공포는 비로소 정렬 가능한 데이터가 된다.
비워진 그 자리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깨끗한 공간과 함께.
정렬감각은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도,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안도의 신호도 아니다.
그저 삶의 계단을 딱 한 칸 올라선 느낌.
그러나 그 미세한 높이의 차이가
다음 스텝을 딛게 하고,
비로소 새로운 삶의 문을 열어준다.
그러니 도망치지 않아도 괜찮다.
온전히 느끼고, 불안해하고, 고통받을지라도
멈추지 않고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 작은 불씨가 기다리고 있기에…
유온의 숲 열아홉 번째 이야기 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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