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독재의 평범성에 대하여
트럼프가 당선되기 전과 후, 보고 싶지 않아도 온 언론이 도배하게 만드는 그의 기상천외한 퍼포먼스. 우크라이나 상황을 보니 더 이상 남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은 게, 우리도 단단히 준비를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날아드는 관세 청구서와 방위비 압박에 세계의 경찰관 노릇은 바라지도 않거니와 이제 협상을 가장한 협박을 서슴없이 하는데도 어쩌지도 못하고 바라봐야만 하는 실정이니까요.
처음엔 그래도 '협상가라면 뒤를 생각하겠지' 했지만 너무 큰 기대였나 봅니다. 이제는 스트롱맨들끼리 손을 잡기 시작했는데요. 우크라이나는 꼼짝없이 부분 휴전을 받아들였습니다. 트럼프는 젤렌스키와 아주 좋은 통화를 했다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요구를 조정했다고 말했고요. 젤렌스키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의 노력에 대해 감사를 표한다며 응대했지만 며칠 전 고함치며 중단됐던 정상회담은 뇌리 속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당신(우크라이나)은 우리(미국)에게 더 많이 감사해야 해."
"당신은 지금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있는 도박을 하고 있는 거야!"
"당신이 러시아와 협정을 맺든지 아니면 우리는 이제 빠질 거야."
오늘 본 기사에는 트럼프가 젤렌스키에 "우크라이나 원전을 미국이 소유하면 어떻겠냐"라고 제안했다고 합니다. 한국식 휴전안이라며 밀어붙이는 미국에 우크라가 수용하지 못하겠다고 버틴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요, 남의 나라 이야기가 멀지 않고 씁쓸하기만 한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왜 유럽은 이 사태를 지켜보고만 있는지, 어찌 됐든 전쟁을 막았으니 트럼프의 퍼포먼스에 박수라도 보내야 하는 걸까요? 세계가 스트롱맨으로 점철되는 동안 왜 제도는 견제장치조차 발동하지 못하고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의 후속작인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를 쓴 하버드 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스티븐 레비츠키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낡은 체제가 극단주의자와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의 손에 들어갈 때 민주주의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다며 민주주의 시스템의 결함을 파고들었습니다.
그 첫 번째로 '패배에 대한 두려움'을 꼽았는데요. 이 두려움이 독재로 되돌리려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는 겁니다. 정당이 두려움을 느낄 때, 앞으로 다시 승리는 없을 것이고 하나의 선거를 넘어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두려워할 때, 패배를 받아들이기는 더 힘들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정당이 지는 법을 배울 때, 민주주의는 비로소 뿌리를 내린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릴 때, 정권 교체는 일상적인 일이 되고 국민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이 다시 민주주의를 회복한 지 70년이 흐른 2021년 12월, 오랫동안 총리직을 수행한 앙겔라 메르켈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해 가을 메르켈의 기독민주당은 야당인 사회민주당에 패했다. 새로운 사회민주당 총리의 소박한 취임식은 마치 서류에 서명하고 문서를 주고받는 것으로 끝나는, 카운티 사무소에서 치르는 결혼식 같았다"
패배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나라 정치권에서도 쉽게 볼 수 있죠.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부정선거 음모론이 대표적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에 격분해 난동을 부린 가담자가 첫 공판에서 재판부에 부정선거 증거를 제출했다고 하죠. 대통령 마저 비상계엄 선포의 배경으로 꼽았던 부정선거 의혹. 패배에 대한 두려움이 언뜻 비치는 대목인데요. 공정성과 투명성은 국가의 근본적인 신뢰를 결정짓는 요소임에도 좀처럼 부정선거 유니버스는 작아지지 않는 모습입니다.
다음으로 꼽은 것은 '독재의 평범성'입니다. 스티븐 레비츠키 교수는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에 대한 위험성을 말했는데요. 얼핏 충직한 민주주의자와 다르게 보이지 않은 이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의 행실을 살펴보면 대부분 정장과 넥타이 차림의 주류 정치인이며, 겉으로 규칙을 준수하고, 심지어 그 규칙을 기반으로 성장합니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살해당했을 때도, 살해도구에서 그들의 지문이 발견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설명하는데요. 하지만 착각해선 안된다며 '표면적으로' 충직한 정치인은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존재를 드러내지 않지만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고 합니다.
책에서는 역사적 사례로 1934년 2월 6일에 파리에서 여러 극우 단체가 주도한 반 의회주의 시위 폭동으로 17명이 사망하고 2000명이 부상당한 사건을 소개합니다. 이 사건은 민주주의에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여러 극우 단체가 의회를 불신하고 반대하는 분위기를 조장했고 프랑스의 주요 정치 위기로 남았는데요. 문제는 주류 보수주의 정치인과 언론매체 대부분은 사실과 완전히 다른 설명을 내놨습니다. 시위자들이 부패와 공산주의 정치적 교착 상태로부터 공화국을 구하고자 했던 영웅적인 애국자라고 주장하고 나섰다는 겁니다.
"1934년 2월 6일에 그들이 흘린 피는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한 깨달음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책에 등장하는 사건들이 최근 우리나라에서 심심치 않게 보인다는 사실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는데요. 정치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고 정쟁으로 흐르기 마련이라 극도로 피하는 몇몇 엘리트들의 모습도 언뜻 떠오릅니다. 먹고사는 일과 정치적 무관심에 끝에 선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책에서는 다양성이 증가하면서 다인종 민주주의가 발전했는데 역설적이게도 이를 대응하는 과정에서 공화당이 민주주의를 저버렸다고도 설명합니다. 이른바 "계급 민주주의"라는 프레임인데, 1960년대 초 로버트 노박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많은 우파 공화당 지도자들이 백인 정당으로 거듭남으로써 인종 위기 속에서 거대한 정치적 금광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며, 평등을 당연하게 여기는 정책에서 소외된, 그리고 분노와 혐오를 느끼는 남부지역의 백인들을 끌어모으고 소수 집단을 위해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들고자 했던 공화당의 10년에 걸친 장기 전략이라고도 말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사에서도 보다시피 다양성을 존중하는 유럽으로의 인재 엑소더스가 일어난다는 사실은 민주주의의 본질은 거스를 수 없다는 사실을 방증하기도 합니다. 이 끝없는 굴레와 싸움에서 우리는 극단주의자들을 경계하는 일, 그들을 서포트하는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과 진짜 충직한 민주주의자를 구별할 수 있는 눈을 키우는 수밖에 없을 텐데요.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 '반민주적인 극단주의자를 고립시키거나 물리치기 위해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경쟁 정당과 손을 잡는다' 이는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폭넓은 연합을 형성하기 위해서(일시적으로)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원칙이나 정책적 목표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자신과 이념적으로 가까운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이념 스펙트럼에서 정반대 편에 있는 정치인과 협력한다. 반편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은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조차 이념적인 경쟁자와의 협력을 거부한다.
레비츠키 교수의 말처럼 우리는 정치인들이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지켜줄 것이라고 기대해야 할까요? 스트롱맨들이 즐비한 글로벌 상황을 들여다보자니 점점 약육강식의 세계로. 과거로 회귀하는 힘은 정교해질 대로 정교해진 지금, 저는 위기 때마다 워치독(Whach Dog)을 품은 의식적인 언론과 쉽게 현혹되지 않는 보통의 사람들을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