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의 '인간성'에 관하여
얼마 전 노벨상 상당 분야를 휩쓴 AI의 등장에 한강 작가가 없었더라면 아마 상실감이 더 컸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AI에 열광하고 AI 관련 인재들은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빅테크의 힘은 나날이 강해지고 있고 국가 권력에 까지 손을 뻗치고 있으니까요. 물론 기술 발전의 한계는 없을까 태클 아닌 태클을 걸어본다면 막대한 전력 수급 문제와 윤리 혹은 프라이버시를 꺼내들 순 있겠지만 불편함을 한 시도 못 참는 인간으로서는 별안간 기발한 방법을 내놓고 마니 쉽진 않습니다.
인간처럼 생각하는 AI가 곧 나온다는 기사는 사실 새로울 게 없습니다만은, 피부로 와닿는 건 시점이겠지요. 빠르면 2~3년 안에 AGI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합니다. AGI는 인간과 유사한 수준으로 다양한 작업을 이해하고 학습하며 적용할 수 있는 인공지능을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특정작업, 이를테면 언어를 번역한다거나 이미지를 인식한다거나 하는 특화된 인공지능과는 달리 인간이 수행할 수 있는 모든 지적 작업을 수행할 수 있고 추가적인 프로그래밍 없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인간처럼'이고요.
봉준호 감독은 AI의 이러한 위협에 대해 AI 스스로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는 일은 없을 것이라면서도 자신은 그러한 이야기를 더 잘 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매 페이지마다 '78번째 수' 같은 독창적인 요소를 넣고 싶다며 AI를 능가하는 창의성을 발휘하고 싶다고도 덧붙였어요. 여기서 '78번째 수'는 이세돌 9단이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대국에서 승리를 거둔 결정적인 수를 말하지요. 이번에 다소 기대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음) 새 영화 'Mickey 17'에선 이러한 철학이 잘 반영되어 있으면서도 AI와 클론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인간성과 기술의 관계에 대해 탐구하고자 하는 새로운 경험을 제공했습니다.
물론 이야기의 진부함(?)이랄까. 그간 우리가 미래를 알고 싶은 욕망과 비례할 만큼 쏟아져 나온 많은 작품에 비견하여 봤을 때 그다지 새로울 게 없다고 평가할 수 있겠지만 봉준호 감독의 이전 작품들처럼 휴머니즘에 닿으려는 목적, SF로서의 새로운 도전이라는 점에는 좋은 평가를 하고 싶습니다.
미키는 '소모품'으로 분류된 인물로 위험한 임무를 맡고 죽음을 반복하며 복제기술을 통해 다시 살아납니다. 그는 자신의 기억과 성격이 새로 복제된 몸에 업로드되며, 죽음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극한의 고통과 존재적 딜레마를 경험하죠. 봉준호 감독은 원작 소설과 같이 7번의 시점이 아니라 10번을 더 늘려 17의 죽음을 이야기한 이유도 삶과 죽음의 평범성을 더 강조하고 싶어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만의 블랙코미디를 상기시키는 대목입니다.
극한 직업이 될 거예요. 죽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거든요.
"그동안은 계속 사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달라, 내가 죽으면 네가 사는 거잖아"
-미키 17과 우연히 삶이 겹친 18의 대화 중에서-
첨단 기술 발전에서의 '인간성'이 아니더라도 이 키워드를 한 발자국 깊숙이 들어가 보자면요. 저는 최진영 작가의 소설 <구의 증명>을 권하고 싶습니다.
최근 역주행을 하며 입소문만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작품인데, 다소 충격적이긴 하지만 '식인'이라는 소재로 우리 시대의 인간성을 역설합니다. '식인(인간이 인간을 먹는)'이라는 행위를 이해할 수 있나라고 물었을 때 상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아니라고 대답하겠지만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이내 그의 진심과 덤덤한 묘사에 설득당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식인은 단순히 인간이 인간을 먹어치우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사회가 구를 잊을 것에 대한 저항이면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경제적 가치로 환원하는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기 때문이죠.
이름도 특이하기만 한 구와 담의 이야기, 이 책의 주인공인 구는 주인공이자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담과 어릴 때 친구이자 연인으로 함께 자라납니다. 그간의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통해 구와 담의 연대는 더욱 강해지지만 현실의 무게는 처참하게 다가옵니다. 구가 전역한 후 부모님이 남긴 사채 빚으로 도망자 신세가 되기 때문이죠. 구는 빚쟁이들에게 잡혀 심하게 구타당해 죽음을 맞이합니다. 먼저 담의 선택으로 문을 여는데요. 담은 구의 시신을 집으로 가져와 먹기 시작합니다.
"구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어야지 마음먹었다. 하지만 내가 따라 죽으면 우리의 시체는 어떻게 되는가. 누가 우리를 거두어줄 것인가. 공무원이 우리를 가져가 태우겠지. 가져갈 때도 접수할 때도 태울 때도 구와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구가 나에게, 나에게 구가 어떤 존재인지, 우리 몸에 새겨진 기억과 추억 같은 것... 상상하지 않겠지. 죽은 동물을 옮기고 태우듯 그러겠지. 우리 몸은 그렇게 사라지겠지. 내 몸이 그리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구를 그리 둘 수는 없다. 그렇다면 구의 몸을 잘 감추고 나도 따라 죽어야지.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었다. "
저는 복잡한 사회 구조 속에서 훼손되는 인간성에 대하여 생각하다가, 곧이어 기술에게까지 위협받는 모습을 상상하자니 서늘하기만 합니다. AI의 중요성만큼 강조되어야 할 것이 AI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요. 그 문제는 만연한 사회구조와 모순이라면. 커져버린 빈과 부의 격차와 소외된 계층에게 사다리가 된다면. 그럴 수는 있을까요? 본인의 이득만을 위해서가 아닌 인간의 욕망보다 한 차원 높은 모두를 위한 비즈니스 모델에 단단히 정착한다면 차라리 응원을 하게 될 텐데 말이죠. 점점 비슷한 목소리들이 커지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