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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광 Aug 30. 2020

2. 사막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흔들리지 않는 꿈을 꾸다

아부다비로부터 두바이까지 걸쳐 있는 리와 사막 한복판에는‘모립 듄’이라는 거대한 모래언덕이 있다. 사막에 있는 유일한 호텔인 리와 호텔로부터 길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그 모래 둔덕은 언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산에 가깝다. 때때로 사막투어를 가게 되면 그 모래언덕을 이정표로 삼아 방향을 파악했다. 사막에서 자칫하면 길을 잃게 되는 것은 어느 각도에서나 보이는 장면이 똑같아서이다. 가장 높이 솟아 있는 모립 듄을 바라보면 출발했던 위치로 돌아올 수 있기에 길 잃을 염려가 없었다. 다른 모래언덕들도 많았지만, 기준점으로 잡을 수 없었던 이유는, 모래 폭풍이 한번 지나가면 여지없이 모양이 바뀌기 때문이었다. 작은 모래언덕의 경우에는 아예 자취를 감추는 일도 다반사였다. 분명 오늘 있던 모래언덕이 내일이면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확실하고 틀림없다고 믿고 있는 것조차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마주하게 될 때이다. 한 번은 가이드도 없이 가족들을 데리고 사막 투어를 간 적이 있다. 지도에도 없는 길을 가야 하는 사막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미리 정해 놓은 이정표들을 의지한다면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날 모립 듄을 찾으래야 찾을 수 없었다. 분명히 있어야 할 곳이라 생각했는데 없었다. 생각해 놓은 다른 이정표를 찾으면 되겠지 하고 사막 안으로 더 들어갔다. 

그러나 가장 큰 기준점을 잡지 못한 채 출발한 것은 타격이 컸다. 어느덧 사막 깊숙이 들어왔지만 어디가 어디인지 방향감각을 완전히 놓쳐버렸다. 되돌아 가려해도 왔던 길을 찾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난감했다. 완전히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주변의 모래언덕은 다 비슷비슷할 뿐 내가 알고 있던 이정표가 아니었다.

휴대전화에 있는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찾아 부랴부랴 GPS를 연결했다. 화면상의 현재 위치는 사막이 아닌 전혀 엉뚱한 위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나라와 달리 잘 잡히지 않는 GPS가 사막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속이 타들어 갔다. 차량을 반복해서 앞뒤로 느리게 움직이며 제발 위치가 잡히기를 바라고 또 바랬다. 

  

얼마쯤을 반복했을까, 어느 순간 드디어 위치가 잡혔다. 나의 위치가 휴대전화의 지도에서 따라 움직이고 있음이 확인되는 순간 기뻐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천천히 사막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막을 빠져나오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저 앞에 리와 호텔이 보이고 나서야 휴대전화로 내 경로를 확인해 본 나는 멍하니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오도 가도 못하는 사막 한복판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내 위치는 겨우 사막 초입에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같은 구간을 계속 돌고 돌았던 것이다. 당시 내 눈에 보이는 사막은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하고 막막해 보였다. 두려움이 앞서자 사막이 실제보다 더 크게 다가왔던 것이다. 


사막과 같은 인생길에서 길을 잃는 이유는 현재 나의 위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러봐도 온통 똑같은 풍광에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낮은 건물 하나 없고, 길도 나 있지 않은 사막을 걸어가노라면 지금 가는 이 길의 방향이 맞는지 불안하고, 또 얼마나 더 가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기에 위치를 알고 방향을 가늠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내 삶의 방향은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가정과 직장에서 나의 위치와 역할은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야 길을 잃지 않는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을 정확히 알고, 나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무작정 걷다 보면 언젠간 오아시스를 만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는 그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무엇으로 채워가는 것이다.’라는 존 러스킨의 충고는 그래서 더욱 의미를 갖는다. 지금 내 앞의 현실이 어려워 보이고 도저히 해결될 것 같지 않지만, 두려움을 내려놓은 채 다시 바라보면 어느 순간 커다랗게 짓누르던 문제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밟고 있는 땅에서 길을 잃고 두려움이 앞설 때, 방향을 알려주는 기준점은 바로 땅이 아닌 저 높은 곳에 있는 하늘이었다.


어느 대장장이가 먼 길을 떠나며 같이 일하는 직원에게 말편자 100개를 만들어 놓으라 하고는 본(本)을 주고 갔다. 나중에 돌아와 보니 직원이 만들어 놓은 말편자는 모두 제각각이었다. 본을 주고 갔는데도 왜 그렇게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중에야 알고 보니 그 직원은 주인이 주고 간 본 대신 자신이 만든 바로 앞의 편자를 보고 다음 편자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3번째 편자는 2번째 편자를 보고 만들었고 50번째 편자는 49번째 편자를, 100번째 편자는 99번째 편자를 기준으로 만들었다. 바로 앞뒤의 편자는 큰 차이가 없었지만, 그렇게 만든 100번째 것은 첫 번째 것과는 완전히 다른 편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막에서는 앞서가는 사람을 따라갈 필요가 없다. 어차피 길이 없기에 다른 사람이 가는 그 길이 맞는 것인지 확신할 수도 없다. 내가 걸어왔던 길도 돌아보면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없기에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 사막에서는 더욱 분명하고 변하지 않는, 최초의 본과 같은 확실한 기준을 바라보고 가야 한다. 남의 발자국을 따라가면 아무 발자국도 남기지 못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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