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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광 Jun 15. 2022

D-14. 욕망의 노예로 사는 법

D.R.I.V.E

인생은 사막을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막에는 길이 없습니다. 설령 길이 있다 하더라도 돌아보면 어느덧 모래바람에 사라지고 보이지 않습니다. 인생의 사막도 마찬가지입니다. 길 하나 없는 그곳에서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존재가치와 소명을 발견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막을 건널 때 필요한 것들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자네, 돈이 하나도 없는 사람과 돈이 너무 많은 사람의 공통점이 뭔 줄 아나. 사는 게 재미가 없다는 거야.”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군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일남’의 대사다. 그는 빚만 잔뜩 진 사람들 가운데 목숨을 건 서바이벌 게임 자체를 순수하게 즐기는 유일한 캐릭터다.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일확천금을 위해 서바이벌 게임에 뛰어들지만, 오히려 치명적인 결과를 맞이하고 만다. 결국 성공을 좇지만, 패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에게 성공이란 다른 사람들의 눈에 그럴듯해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을 가졌거나 어떠한 것을 이루는 등의 성취와 관계가 있는 것이다. 가령, 승진을 하거나 돈을 많이 벌거나, 자녀가 좋은 대학에 입학하면 성공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것이 생긴다. 그러한 성공을 이루면 몸과 마음이 뿌듯하게 벅차올라 행복한 삶의 상태로 들어서게 되는 것일까? 그 말이 맞는다면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돈이 많은 사람들은 반드시 행복해야만 한다. 그러나 의외로 권력자나 재벌들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는 별로 들어 본 적이 없다.      


아니면 성공한 사람들에게 그 비결을 물어보면 어떨까? 그들로부터 시원한 대답을 듣고 그대로 따라하기만 한다면 누구나 다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한편으론 그렇게 간단한 방법이 있다면 왜 진작 많은 사람이 성공하지 못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그렇다. 얼굴이 모두 다르고 지문이 모두 제각각이듯 성공에 대한 잣대도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건만, 우리는 성공에 대해 획일적인 기준과 맹목적인 잣대로 평가한다.      


더구나 ‘남들보다 더 빨리’라는 논리는 성공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남과 비교하여 더 많이 갖고,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이 성공이라 생각하기에 그러한 사회적 틀속에서 우리는 성공에 대해 조급증을 낼 수밖에 없다. TV와 유튜브, SNS 등에서는 모든 것을 돈과 명성에 초점을 맞추도록 유도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성공의 추구를 종용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마치 100m 달리기를 위해 출발선에서 몸을 구부리고 뛰어갈 준비를 하는 선수들처럼 항상 긴장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성공이 곧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뭔가를 달성하고 취득하는 외적인 성공에서 행복은 비롯된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하지만 성공하여 마침내 내가 바라던 것을 손에 넣었는데도 결국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오랜 무명 생활 끝에 마침내 꿈을 이룬 영화배우 짐 캐리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되고 유명해져서 꿈꾸던 일을 죄다 해봤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그게 답이 아니란 걸 알게 될 테니까요.” 

성공을 지향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비교’와 ‘경쟁’이라는 두가지 잣대를 운명처럼 만난다. 그리고 당장 채우고 싶은 만족과 성공에 대한 조급함은 결국 후회와 상처밖에 남는 인생이 되고 만다.     


돌이켜보면 나는 주인이 아닌 삶을 살아왔다. 내 삶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삶이 좋아 보였다. 게다가 다람쥐 쳇바퀴 돌듯 출근했다가 가끔 소주 한잔 마시고 집으로 가는 삶은 세상의 성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남들보다 더 빨리 성공하려면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챙겨야 하며, 다른 것도 미리 생각해 놓아야만 했다. 그래서 머릿속이 항상 복잡했다. 로스쿨에 들어가 볼까, 아니면 늦은 나이지만 유학을 가서 학위를 따볼까, 아니면 이민을 가볼까 하는 고민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고민 속에 나를 스스로 가둬두지 않는다. 물론 적절한 시기를 놓친 탓이기도 하지만, 내가 고민했던 모든 것들이 실상은 내 자신이 절실하게 원했다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그럴듯한 인생으로, 성공적인 인생으로 보이고 싶었던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변호사도 좋고 교수도 좋지만, 그보다 먼저 현재의 나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출한 가족과 함께 강아지를 키워가며 그 가운데에서 새로운 꿈을 향해 살아가는 것도 나름대로 괜찮은 삶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적어도 다른 사람들이 내 인생을 흔들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삶의 방식을 소유양식과 존재 양식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개인 소유욕을 자극하기 때문에 우리의 가치관은 부지불식간에 소유 지향적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천만 원 상당의 명품 핸드백이 십만 원짜리 핸드백보다 백 배만큼 아름답거나 오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억 원이 넘는 럭셔리 스포츠카가 2천만 원짜리 중형차보다 열 배 빨리 달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니, 현실에서의 도로교통법은 두 배 이상 빨리 달리 달리는 것조차 허락치 않는다.

우리는 에리히 프롬이 얘기했듯이 ‘존재욕’을 ‘소유욕’으로 채우려 한다. 그러나 자기과시는 타인의 인정을 통해 공허한 존재감을 채우려는 자기 위로의 한 방식일 따름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허한 속을 달랠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욕망에 관해 오랫동안 연구한 미래학자 멜린다 데이비스는 현대인이 직면한 가장 큰 위기는 ‘내면 깊은 곳의 혼란을 제대로 극복할 수 있느냐’의 문제라고 한다. 그 ‘내면 깊은 곳의 혼란’이란 결국 돈이 곧 행복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국민 총생산이 8,000달러를 넘어서면 아무리 부가 증가해도 만족도는 높아지지 않는다는 스탠퍼드 대학의 조사 결과는 경제적 성공과 행복이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한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MIT 교수 폴 새무엘슨은 ‘행복은 소비를 욕망으로 나눈 것’이라는 공식을 만들었다. 행복 지수를 높이기 위해서는 분모인 ‘소비’를 늘려야 하고 그러면 당연히 행복은 올라간다. 그러나 소비는 유한하다. 한 사람이 소비할 수 있는 능력은 한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눈치챘겠지만 행복 지수를 높이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 그건 분모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분자를 줄이는 것이다. 즉 ‘욕망’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방법을 일부러 모른척 외면하고 살아간다. 사실 우리는 이미 과거에 비해 훨씬 부유하지만, 항상 더 많은 것을 바라는 탓에 늘 부족하다고 느낀다. 욕망은 우리를 한순간도 쉬지 못하게 하고 더 많은 것을 좇아 뛰게 만들고, 그러다 어느 순간 ‘욕망’이 ‘소비’를 넘어서면 통제 불능의 탐욕이 되고 만다. 결국 욕망이 자신을 삼켜버리고 마는 것이다.     


<오징어 게임>의 최후 승자는 거액의 상금을 획득한 주인공이 아니다. 7,700억 원을 투자해 6조 원이 넘는 경제적 이익을 거둔 ‘넷플릭스’ 야말로 진정한 승자일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 드라마 속에 나온 인물들처럼 승자 없는 게임 속에 던져져 욕망의 노예로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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