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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광 Jun 29. 2022

D-19. 진정한 성공은 마지막에 알 수 있다.

D.R.I.V.E

인생은 사막을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막에는 길이 없습니다. 설령 길이 있다 하더라도 돌아보면 어느덧 모래바람에 사라지고 보이지 않습니다. 인생의 사막도 마찬가지입니다. 길 하나 없는 그곳에서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존재가치와 소명을 발견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막을 건널 때 필요한 것들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빅터 프랭클은 강제 수용소에서 매일 해 뜨기 전부터 작업장을 향해 수 킬로미터씩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땅에 구덩이를 팔 때면 나치 감시병들이 총과 채찍을 들고 다가왔다. 찢겨진 죄수복 틈으로 겨울바람이 파고들었고 수시로 감시병들이 개머리판으로 때리며 발로 찼다.      

하루는 감시병들에게 영문도 모른 채 맞을 때였다. 문득 아내가 떠올랐다. 아내가 살아 있는지조차 몰랐지만, 아내를 떠올리자 희망이 생겼고, 빅터프랭클은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아내가 웃는 모습을 봤다. 용기를 주는 듯한 표정으로. 아내의 모습은 막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보다 더 밝게 빛났다.” 

그때 그에게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건 바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장 궁극적인 삶의 목적은 의미와 가치를 찾는 데 있다는 것이다. 춥고 우울한 폴란드의 3월, 그는 삶의 의미를 깨달았다.     


누구나 타인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 원한다.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서 자신이 중요한 존재임을 느낄 때 살아야 할 의미를 발견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인정을 통해서만 나의 중요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자신을 중요한 존재로 만들면 된다. 내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는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순간 나는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나아가 다른 이로부터 사랑을 받아야만 하는 영원한 과제에서 벗어나게 된다.      


세상의 성공을 향해 달려왔는데 문득 돌아보면 손에 잡히는 것 하나 없고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많은 것을 잃어가며 성공을 잡을 수 있었는데 막상 성공이란 것이 별것 아님을 알고 실망하는 경우도 있다. 성공을 이루었는데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은 도대체 메꾸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성공은 오래가지도 않는다. 또 다른 시련과 역경이 찾아오면 성공은 이내 자리를 내주고 만다.     


그러나 한가지 좋은 소식이 있다. 우리 삶의 기준을 ‘성공을 위한 삶‘에서 ‘승리를 향한 삶’으로 전환하기만 하면 인생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이 떠진다는 것이다. 알프레드 노벨처럼, 마더 테레사처럼, 그리고 빅터 프랭클처럼 의미와 가치로 충만한 삶으로 나아가는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승리의 삶’은 힘을 내어 자신의 소명을 찾는 것에서 출발한다. 자신에게 어떠한 재능이 있는지,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현재 자신이 서 있는 곳은 어디인지,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제대로 가늠해야 한다. 결과보다 과정에 가치를 두고, 내면을 충족하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유익보다 타인의 필요를 충족해주는 그곳에 승리의 기쁨이 넘치게 된다.      


다행인 것은, 더 이상 일어설 수 없을 만큼 실패한 인생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성공과 승리는 엄연히 다르다. 성공의 반대말은 실패이지만, 승리의 반대말은 도전하지 않는 것이다. 성공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지만, 승리는 보이지 않지만 대체불가능한 가치들을 소중히 여긴다. 

더구나 승리는 일시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성공을 향한 삶은 한 번 실패하면 다시 회복하기 어렵지만, 승리의 삶은 그렇지 않다. 다시 일어나 먼지를 툴툴 털고 다시 걷는다. 따라서 수많은 실패를 하더라도 얼마든지 최종적으로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3천여 년 전 두 눈이 뽑힌 채 수치를 당하고 있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사람들의 조롱과 야유를 받는 실패한 인생이었지만, 마지막 소명을 다함으로써 거룩한 승리의 삶으로 변모될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성경에 가장 힘센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는 ‘삼손’이다. 삼손과 데릴라의 이야기는 밀턴의 시극(詩劇) <삼손>, 생상스의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 등 많은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사자도 맨손으로 죽이는 엄청난 힘으로 20년간 이스라엘을 지배해온 그는, 적국 블레셋의 요부 데릴라의 꾐에 빠져 괴력의 원천인 긴 머리카락이 잘려 나가고 만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은 모든 힘을 잃고 무력해진 삼손의 두 눈을 뽑아버리고, 청동 족쇄를 채워 거대한 맷돌을 돌리는 노예 신세로 만들어 버린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이 숭배하는 다곤 신의 제삿날에 삼손을 웃음거리로 만들기 위해 신전으로 끌고 나온다. 한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삼손은 이제 목에 무거운 사슬을 맨 채 사람들의 함성 가운데 재주를 부려야만 한다. 너무나 비참하고 초라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치욕의 시간 속에서도 삼손의 머리카락은 조금씩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삼손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신전의 지붕을 받치고 있는 두 개의 기둥에 몸을 기대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어느덧 다시 자란, 실패와 실수의 회한이 담긴 머리털을 보고 이렇게 부르짖는다.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사사기 16:28)     


삼손이 신전을 떠받치는 두 기둥을 밀며 이 간절한 기도를 드렸을 때 그에게 다시 능력이 부어진다. 기둥과 함께 돌로 된 지붕이 사람들의 머리 위로 무너져 내렸고, 블레셋 사람 3천명이 죽는다. 삼손이 살아서 죽인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의 인생은 실패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고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을 통해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만듬으로써 결국 최종적인 승리에 다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일어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신은 넘어뜨린다.’라는 말이 있다. 긴 터널을 지나야 태양은 더 빛나며,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 반짝이는 것처럼 삶은 언제나 우리가 위기에 봉착할 때를 기다렸다가 가장 빛나는 순간을 드러낸다. 가시 없는 장미는 장미가 아니다. 실패 없는 성공을 원한다면 가시 없는 장미를 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실패와 성공은 동의어다. 실패 없는 성공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승리’를 ‘성공’이라는 단어의 가까운 어디쯤에 있는 의미로 해석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인생은 곧 경쟁이며, 삶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이기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의 왜곡된 생각이다. 이제 성공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긴 호흡으로 자신의 내면을 파악하고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칼릴 지브란이 노래했던 것처럼, ‘사원의 기둥이 서로 떨어져 있듯 함께 있되 거리를 두고 하늘과 바람이 그 사이를 춤추게 하는’ 여유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바로 그때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성공보다 훨씬 중요하고도 대체 불가능한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승리로 향하는 문은 여전히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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