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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광 Jul 04. 2022

D-20. 좋은 사람으로 남으려 하지마라

D.R.I.V.E

인생은 사막을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막에는 길이 없습니다. 설령 길이 있다 하더라도 돌아보면 어느덧 모래바람에 사라지고 보이지 않습니다. 인생의 사막도 마찬가지입니다. 길 하나 없는 그곳에서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존재가치와 소명을 발견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막을 건널 때 필요한 것들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예전 운영하고 있던 독서 모임에 새로 가입을 희망하는 분이 연락을 해온 적이 있다. 독서 모임 온라인 카페에 간단한 인적 사항과 함께 신규가입 희망 신청을 남기면 승인해드리겠다고 답변을 드렸다.

얼마 후 온라인 카페를 열어본 나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간단한 인적 사항 대신 자신의 명함을 통째로 스캔해서 올려놓은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일반명함과는 달리 명함 앞, 뒤로 본인의 경력과 이력 사항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마치 한 장의 이력서를 보는 것만 같았다.      

독서 모임에 그런 정보가 왜 필요하다고 생각한 걸까? 입사지원서를 받는 것도 아닌데 굳이 남들이 자신의 과거 경력까지 알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차라리 읽고 싶은 도서 목록이었다면 모르겠지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과도한 정보를 주고받는 이면에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회적 체계가 녹아 들어 있다. 일과 관련해서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일단 직업과 직책을 묻는다. 그것은 직업 자체에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위계 구조에서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가 궁금한 까닭이다. 궁극적으로 상대방의 사회적 지위가 자신보다 높은지 낮은지를 파악해 그에 따라 적절하게 행동하려는 방편인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성격, 취미, 가치관, 태도 등 주관적인 개인의 특성을 통해 사람을 정의하는 반면, 동양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와 관계 등 타인의 기준을 통해 사람을 정의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한 개인의 의미와 가치는 집단적 관계와 사회적 가치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에 특히 평판을 중요시하는 한국인에게 타인의 시선은 너무나 중요하다.     


우리가 타인의 시선에 민감해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차를 선택하는 것도, 직장에 들어가는 것도 남을 의식한다. 대학에서 전공을 정하는 것도, 심지어 결혼 상대를 고르는 것도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옷을 입거나 양말 색깔을 고르는 것도 예외가 아니다. 어느 것 하나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워 혼자서 밥도 마음대로 못 먹는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누구인가? 와 같은 질문은 스스로 고민하고 성찰해서 해답을 찾아가야 하지만, 정작 자신이 결정하지 못한다. 인생을 관통하는 근원적인 질문조차도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의해 결정된다. 설령 내가 판단하고 결정했더라도 내가 한 판단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의 가치를 결정하는 건 결국 타인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남들의 시선과 평판이 나의 삶과 행복에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그들은 나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저 밖으로 드러난 몇몇 모습만을 보고 함부로 재단할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재미를 위한 잡담 수준의 이야기에 온 삶이 왜곡되고 마는 경험을 하곤 한다. 내 삶을 단 1%도 전혀 책임지지 않는 그들의 시선에 왜 휘둘려야 하는지 의문이다.     


몇 년 전 해외 토픽난의 작은 기사가 올라왔다. 프랑스 일류 요리사인 베르나르 루아조가 자살했다는 뉴스였다. 아내와 3자녀를 남겨두고 총기로 자살한 사실이 이제는 새삼 뉴스거리가 아닌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가 자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특별하다. 

그 이유는 ‘미슐랭 가이드에서 조만간 최고 등급에서 별 하나를 뺄 거라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죽기 전에 “나는 항상 1등이 되려고 했는데, 이제 2등도 아닌 3등이 되었다.”라며 괴로워했다고 한다. 외부평가에 의존하는 존재감은 그렇게 위태롭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칭찬과 인정에 목말라 한다.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해줄 때 우리는 행복감을 느낀다. 이는 곧 아무리 스스로 만족하더라도 타인의 인정이 없으면 행복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의 눈에 내가 훌륭한 직장을 다니고, 좋은 집에 살고, 커다란 차를 타는 것처럼 보여야 행복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 그렇게 비춰지지 않는다면 나는 불행한 것이다.     


그러나 심리학자 아들러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다른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구하는 삶을 살게 되면 다른 이들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삶을 살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는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가치관을 희생해서라도 ‘남들이 생각하는 나’의 형상을 만들고, 거기에 맞춰 살려고 애를 쓴다. 미국 사회학자 찰스 쿨리는 이런 현상을 ‘거울 자아’라고 부른다. 거울 자아는 다른 누군가에게 보이는 왜곡된 이미지로 살아간다. 그러한 삶은 내가 누구인지,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 알 수조차 없다. 그러한 삶은 아무리 내게 주어진 배역을 잘 소화해도 불만족스럽고, 우울하고, 가치 없는 사람처럼 느낄 수밖에 없다.     


사람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동기요인 중 하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남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누리길 원한다. 그것이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기본 도리이긴 하지만, 솔직하게는 좋은 사람으로 평판이 나면 여러 가지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생존과 성공에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느 누구와도 갈등을 피하고 척지지 않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겉모습뿐인 경우가 많다. 겉으로는 미소를 띠며 온화한 척, 너그러운 척하지만 속으로는 온갖 비난을 퍼붓는다. 분노하며 험담하지만 여전히 얼굴에는 너그러운 웃음을 띄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이중적 태도는 언젠가는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 다른 사람을 속이기도 하지만, 자신마저 현혹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소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결국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평판을 중요시 여기는 배경에 있다.      


우리는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한다. 그러나 사실 다른 사람들은 생각보다 내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나 혼자 스스로 그런 걱정 속에 빠져있을 뿐이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늘 고민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깜짝 놀랄 것이다. 사실 남들은 나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으니까.”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남을 배려하는 삶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나답게 사는 것이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남들의 평판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남들의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자유를 갖는 것이다. 그러한 삶은 자신에게 필요하고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삶이다. 이는 곧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일을 안 해도 되는 삶, 시간과 노력의 낭비가 없는 삶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 착한 사람, 다른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한 삶이 아니라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좋은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 따라서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것이 차라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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