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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광 Apr 24. 2022

D-1.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질문에 답하려면

 D.R.I.V.E.

책을 쓰느라 자리를 오래 비웠습니다.

<브런치>에서 간간이 ‘작가님의 글을 못 본 지 00일이 지났어요. 작가님의 글이 읽고 싶어요’라며 보내오던 앙증맞은 협박(?)도 더 이상 걸어오지 않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관심을 받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분명 자동으로 셋팅해놓은 시스템에서 발송되는 알림일텐데 더 이상 받지 못하게 되니 섭섭한 기분마저 듭니다.

블로그도 마찬가지입니다. 새 글을 올리지 않았으니 방문자가 없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도, 누군가 행여 댓글을 달아놓지는 않았을까 하는 어리석은 기대를 갖곤 합니다.


얼마간의 공백을 보내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물론 그 시간동안 저는 글을 썼습니다.

글을 쓰는 시간이 그리 달갑지는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스스로 그 일에 뛰어드는 까닭은 아마도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인 ‘망각’ 덕분인지 모르겠습니다.


제 두 번째 책 <D.R.I.V.E>가 아직 출간 전이라 틈틈이 앞으로 그 책과 관련한 내용 일부를 조금씩 올려볼까 합니다. 전작 <달리는 낙타는 사막을 건너지 못한다>가 주관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인생에서 만난 사막을 다룬 에세이였다면, 이번에는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은 만날 수 밖에 없는 사막을 어떻게 건널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인생은 사막을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사막에는 길이 없습니다. 설령 길이 있다 하더라도 돌아보면 어느덧 모래바람에 사라지고 보이지 않습니다. 인생의 사막도 마찬가지입니다. 길 하나 없는 그곳에서는 지도보다 나침반을 의지해야 하며,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존재가치와 소명을 발견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막을 건널 때 필요한 것들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D.R.I.V.E> 법칙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사막을 건너는 것을 ‘차를 운전해가는 여행’에 빗대어 놓치지 말아야 하는 가치들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자신만의 목적지를 향해 ‘삶을 Drive 하라’는 것입니다.

어제와 다른 삶을 원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주저앉을 수밖에 없더라도, 그것이 삶의 일부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또다시 떠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 모두 머물 수 없는 나그네의 삶 가운데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수시로 넘어졌습니다. 누군가의 발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지만, 제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장애물에 걸려 넘어진 적이 더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채 아픔을 느끼기도 전에 다른 사람의 시선을 먼저 의식했습니다. 누군가 쓰러진 저를 보기 전에 어서 몸을 일으켜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한다고 되뇌었습니다.

넘어지는 것을 미리 막지 못했다는 자책보다도 저를 더 힘들게 한 건, 어떤 상황을 만나도 그럴듯하게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제 자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가정이었습니다. 몰래 아픔을 참을지언정 아파 보이는 건 제겐 비참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거기까지였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여태 경험해 본 적 없는 속력으로 떨어지고 나자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전까지 제 삶이란 <목마(木馬)와 숙녀(淑女)>에 나오는 ‘거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할 뿐이었지만, 떨어져 뒤집히고 나서야 비로소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은 유난히 파랗고 구름은 새하야며, 바람은 융단처럼 보드랍고, 나뭇잎은 푸릇푸릇하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그전까지는 그저 뿌연 유리창에 비친 모습들이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이건 분명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제 삶을 제가 운전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습니다. 성공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액셀을 밟으며 전속력으로 달려왔지만, 그곳에 도달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곳은 영원히 갈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목적지를 제가 정한 것도 아니고, 그곳을 정말 제가 원하는 것이 맞는지를 단 한 번도 고민해본 적도 없었으니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건 운전대를 직접 잡고 있지 않으면서도 다른 이들이 정한 목적지를 제가 정한 걸로 착각하며 전력을 다해 달려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남들이 나를 인정해줄 때 행복감을 느낍니다. 이는 곧 타인의 인정이 없으면 행복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가 나를 인정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내가 성공하고, 좋은 직장을 다니고, 좋은 대학교를 나오고,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고,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은 것처럼 보여야 행복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그렇게 비치지 않는다면 나는 불행한 것입니다.


우리가 타인의 시선에 민감해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옷 입는 것도, 양말 색깔을 고르는 것도, 차를 선택하는 것도, 직장에 들어가는 것도, 대학을 정하는 것도, 결혼을 하는 것도, 말 한마디 하는 것도 어느 것 하나 남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없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의해 결정되고 있습니다. 설령 내가 판단하고 결정했더라도 내가 한 판단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타인이 나의 가치를 결정하는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중동의 아부다비에서 근무할 때 외국인 현지 직원을 채용한 적이 있었습니다. 면접을 위한 이력서를 받아보고는 특별히 눈길이 간 곳이 있었습니다. 학력과 경력 등의 신상정보는 단출했지만, 오히려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던 것은 본인의 성격과 취미에 관한 사항이었습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주말에 어떠한 취미를 갖고 있는지에 대한 개인적인 특성을 강조하는 정보들로 가득했습니다. 이건 회사를 지원하는 것인지 동호회에 가입하기 위한 것인지 혼란스러울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전에 회사 단기직원 면접에서 보았던 이력서가 자연스레 떠올랐습니다. 굳이 알 필요까지 있을까 할 정도의 깨알 같은 경력과 훌륭한 스펙들로 가득한 그 이력서들의 내용들은 모두 엇비슷했습니다. ‘자격과 역량’은 가득 채워져 있지만 ‘사람’은 없었습니다.


회사에서 젊은 후배들에게 삶의 목표를 적어보라고 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성공이라고 여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대다수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우리는 성공이 곧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뭔가를 달성하고 취득하는 외적인 성공에서 행복은 비롯된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돈을 벌고 승진을 해서 무엇을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는 선뜻 대답하질 못합니다. 거기까지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는 답변이 돌아옵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승진하는 자체가 무엇이 나쁘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을 고민하지 않은 채 남들을 쫓는 것은 위험합니다. 성공하여 마침내 내가 바라던 것을 손에 넣었는데도 오히려 불행한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주변엔 비일비재합니다.


문득 외롭고 헛헛한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루의 고단함과 아픔을 나누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지만, 그 누구와도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내가 나를 위해 만들어 놓은 울타리가 단단한 벽이 되어 자신을 가두고 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그동안 힘들게 이루어놓은 결실들이 더 이상 어떤 위안이나 기쁨도 되지 못함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많은 일을 이루고도 공허와 결핍을 느끼는 이유는 ‘내’가 소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쾌락과 욕망의 충동에 약해지게 됩니다.


최근 <뉴욕타임스>는 21세기에 들어 미국 베스트셀러 목록의 1/3 이상이 긍정적인 사고관이나 성공을 위한 지침서와 같은 자기계발 관련 책들이라고 밝혔습니다. 우리는 매스컴이나 인터넷을 통해 끊임없이 성공하거나 대박 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은연중에 그러한 성공 신화들을 동경하면서, ‘나는 언제나 저렇게 될까?’ 하는 꿈을 꾸곤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앞서 달려 성공한 사람들의 고난과 역경, 그것을 이긴 노력과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감탄하며 흉내 내고자 합니다. 그들이 쓴 책을 읽고 그들의 방식을 따라 해보기도 하며, 그들의 고난에 경의를 표하기도 합니다. 그러고는 자신과 그 사람의 차이는 아직 자신이 흘린 땀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며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합니다.


그러나 정작 따지고 보면, 우리 주변에는 성공한 사람들보다는 실패하거나 망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실패담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려 합니다. 오로지 성공에 모든 관심을 쏟습니다. 그럴듯한 성공 방정식과 구호에 사로잡혀 그들과 똑같은 길을 가고자 합니다. 그 길을 걸으면 마치 보물상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착각 속에 오늘도 그들의 뒤를 따라갑니다.

모두가 행복을 원하지만, 여전히 타인의 성공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준은 나의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습니다. 행복을 좇는다며 소중한 삶을 헛되이 낭비하며 살아가기도 하고, 성공의 사다리를 향해 올라간다며 자신의 인생을 남들의 기준에 저당 잡힌 채 살아가기도 합니다. 다른 이를 부러워하고 동경하는 삶을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진정 소중한 가치를 희생하며 살아왔음을 깨닫게 되는 일은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던 제 지인 한 분은 죽음을 앞에 둔 사람들을 많이 목격했습니다. 언젠가 제게 마지막 순간에 그들이 후회하는 것들에 대해 들려주었던 적이 있습니다. ‘좀 더 돈을 많이 벌어야 했는데, 좀 더 출세했어야 하는데, 좀 더 좋은 집에서 살아야 했는데’라고 들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대신 마지막에 후회하는 것은 하나같이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좀 더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어야 했는데, 좀 더 사랑하고 용서했어야 했는데, 아무것도 아닌 일에 왜 그리 화를 냈을까’와 같은 것들이라는 겁니다.


자신의 행복은 타인으로부터 받을 때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있을 때 가능합니다. 많은 부부가 결혼하기 전에는 결혼하지 못해서 안달하다가 막상 결혼하고 나서 얼마 후에는 ‘남편 때문에 못 살겠다. 아내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라고 합니다. 이는 배우자가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타인으로부터 기쁨을 받으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행복하니까 결혼하는 겁니다. 자신의 행복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흘려보내 주고 싶어서 결혼하는 겁니다. ‘행복해지려고 하는 결혼’은 그래서 언젠가는 그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자신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대방에 대한 실망만 커질 뿐입니다.


여기서 비극이 발생합니다. 상대방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변화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하지만, 오히려 갈등만 증폭됩니다. 다툼만 생겨납니다. 그러기에 자기 생각만 옳다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신과 다른 점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항해를 통해 자신의 영혼 이외에는 누구도 자기 삶을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유로운 영혼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게 됩니다. 맞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때로 그러한 인식이 지나치면 자기방어를 위해 주변에 거대한 울타리를 쌓아놓게 됩니다. 그 높은 담을 우리는 ‘주관’이라고 부르며 그 울타리 안에 자신을 가둬놓습니다. 자신이 보기에 ‘주관’이 아닌 것은 결코 울타리 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그 밖의 것들은 외면하고 배척합니다. 하지만 보다 자유롭고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만지고, 맛보고, 끌어안고, 겪어야 합니다.


우리의 두뇌는 착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결국 거짓말 자체를 어느덧 진실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에 걸맞게 행동하고 말하며 생각하게 된다고 합니다.

어제와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제의 나와 결별해야 합니다. 역사가 B.C와 A.D로 구분되듯이 자신의 시간을 행복해지기 전과 행복한 이후의 삶으로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행복한 이후의 시간이란 바로 ‘지금 이 순간’입니다. 착각을 결심한 순간 삶은 바뀌기 시작합니다.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 걸맞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해야 합니다.


같은 감옥에 갇힌 두 사람이 창 너머를 바라볼 때 한 사람은 흙탕물이 고인 바닥을 보고 다른 한 사람은 밤하늘의 별을 바라봅니다. 자신이 직면한 상황과 여건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행복한 삶을 살아갈 자격이 있는 자는 희망의 눈으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삶, 그건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먼저 아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더 이상 타인의 갈증을 채우지 말고 자신만의 목적지를 향해 직접 운전해가길 바랍니다. 그것이 ‘승리’를 향한 삶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지금 이 순간 자신만의 지도를 보며 행복한 승리를 향해 떠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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