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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광 Oct 25. 2020

6. No Entry

달리는 낙타는 사막을 건너지 못한다

해외 원전건설을 위해 중동 아부다비 사막에서 근무했습니다. 사막은 예상보다 더욱 뜨겁고 황량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제 인생에 진정한 사막이 펼쳐졌습니다. 평생 정상을 향해 오르는 인생을 살아왔던 저는 사막을 만나자 휘청거렸고, 방향을 잃고 흔들리더니 결국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는 사막을 걷게 되면서 인생은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닌 사막을 건너는 것과 같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이라는 사막을 건너기 위해서는 낙타처럼 천천히 걸어야만 함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막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그것을 하지 못하는 차이에서 오는 부분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실과 자신이 바라는 기대의 괴리감이 클수록 행복감도 낮아지고 자존감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행복을 위해 자신이 바라는 기대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는 경우이다. 기대를 충족하기 위한 욕구가 때로는 동기유발과 성장을 위한 촉매제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지나친 욕심은 오히려 행복과 거리가 멀어지도록 만든다. 

아부다비까지 온 이유도 내 자신이 바라는 기대를 충족시키고, 궁극적으로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적어도 풀 한 포기 없는 사막에 들어오게 될 때는 끝도 없는 욕심은 어딘가에 내려놓고 왔어야만 했다.         


눈을 떠 보니 어느 날 문득, 사막 한가운데에 있었다. 마치 영화 <시간 여행자의 아내>의 주인공처럼 순간 이동으로 생각지도 않은 장소에 와 있는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낯설고 생경하였다. 건설현장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내가 밟고 있던 모래를 한 움큼 갈색 유리병에 담은 일이었다. 마치 모래시계처럼. 시간이 흘러 이 사막에서의 기억이 그림자조차 남아 있지 않게 된다고 해도 그 시간을 영원히 유리병 안에 담고 싶었다.     


6개월을 꼬박 사막에 있었다. 잠시 휴가를 다녀온 것을 제외하고는 건설현장에 있었다. 현장은 원자력 발전소 특성상 시가지나 주거지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사막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고, 삼엄한 경계와 울타리로 인해 외부에서의 접근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건설노무자들을 포함하여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건설현장은 마치 외부와 차단되어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작은 도시와도 같았다. 여의도 면적의 절반쯤 되는 방대한 건설현장 부지 안에는 사무실과 식당, 숙소, 편의시설 등의 모든 시설이 있었으며, 넓은 부지 탓에 출근할 때나 식당을 갈 때도 차량을 이용해야만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24시간의 모든 일상이 건설현장 부지 안에서 이루어졌다. 준공일정을 준수하기 위해 이른 아침 7시부터 시작되는 근무에 맞춰 유니폼과 안전 조끼를 입고, 안전화를 신고 사무실로 출근을 했다. 안경을 쓰지 않는 나는 고글을 쓰는 것이 답답하긴 했지만, 아침부터 강렬히 내리쬐는 햇볕 아래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무실에서 현지 U.A.E 직원들과 함께 근무하는 것이 어려운 데는 언어 차이에 따른 소통의 어려움도 있지만, 그보다도 종교와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더 컸다. 이전까지 접해보지 못한 이슬람 종교와 무슬림 문화에 대한 생소함은 내가 그곳의 낯선 이방인임을 확인하게 만들고는 했다. 

특히 이슬람 종교에 대한 몰이해는 여러 번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는데, 전화하거나 심지어 직접 미팅을 하는 중에도 기도시간이 되면, 그들은 어김없이 모든 일을 중단하고 기도를 하기 위해 사라졌다. 하루에 4번, 매일 해가 뜨는 시각에 맞춰 조금씩 변하는 기도시간은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시되는 불가침의 영역이었다. 대화가 끊기거나 일이 마무리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기도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기도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들리면, 그들은 손과 발을 깨끗이 씻고 별도의 기도 방에 모여 그들의 신께 엎드려 기도를 올렸다. 지나칠 정도로 종교에 대해 맹목적인 헌신을 하는 그들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자신들만의 믿음과 신념을 지니고 있는 모습이 어떤 면에서는 부럽기도 했다.    


건설현장 내에서는 사고 예방을 위해 일체의 음주가 허용되지 않았고, 생활 방식과 근무 형태에 있어서도 엄격한 규율과 통제가 요구되었다. 그래도 퇴근 후 각자의 숙소에서는 자유롭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숙소라고 해봤자 침대와 책상 하나, 조그마한 냉장고와 TV가 전부지만, 개별 화장실과 샤워실이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빨래, 청소와 같은 자질구레한 일상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출근할 때 개별 숙소의 문 앞에 있는 빈 바구니에 빨래거리들을 넣어 놓으면, 퇴근할 때는 이미 바구니 안에 차곡차곡 옷들이 개어져 담겨 있었고, 어떤 옷들은 다림질까지 되어있었다.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네팔 등 인근의 가난한 국가에서 온 하우스 보이들 덕분이었다. 신기하게도 그들은 하나같이 무엇이 그리 기쁜지 항상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열악한 근무환경에서 하찮은 일을 하면서도 환하게 웃음 짓는 그들을 통해, 최빈국 중 하나인 부탄이라는 나라가 UN에서 발표한 국가별 행복지수가 왜 가장 높은지가 조금은 이해되었다.

성실하고 착실한 그들도 가끔 실수할 때가 있었는데, 어떤 날은 처음 보는 옷이 내 바구니에 담겨 있기도 했고, 엉뚱하게 내 옷이 다른 호실의 바구니에 있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혼동을 막으려는 방편으로 모든 옷에 조그맣게 각 호실의 번호를 적어 놓았다. 어떤 옷은 하단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글씨로, 또 어떤 옷은 안쪽 옷감에 붙어 있는 태그에 숫자를 적어놓았다. 그때는 그것이 마치 감방에 갇힌 죄수 번호와 같은 느낌이 들어 너무나 싫었는데, 얼마 전 옷장에서 오래된 옷을 정리하다 그 번호가 적혀 있는 옷 하나가 아직도 있음을 발견하고는 한참을 멈칫했다. 그 옷을 통해 잊고 있었던 그때 그곳에서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평일에는 바쁘게 일에 몰두하면 그만이었지만, 문제는 주말이었다. 더운 날씨 탓에 어디론가 나가기도 어렵지만 현장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는 막막한 사막이었다. 그저 좁은 방안에서 책을 읽거나 TV를 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주말마다 방안에 틀어박혀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럴 때면 40도가 넘는 더위에도 불구하고, 얼굴 전체를 버프로 덮은 채 그 위에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현장에서 아부다비 시내로 향하는 셔틀 버스에 올라탔다. 우리나라였다면 강도로 오인받기 딱 좋은 복장이었을 것이다. 시내까지는 5시간 가까이 걸렸지만, 아부다비 시내에서 간단한 쇼핑도 하고 카페에서 커피도 한잔 하면 그나마 숨통이 틔었다. 그것이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오락거리이자 소일거리였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사막으로 다시 돌아오면 얼마 동안은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아부다비 시내를 다녀오는 주말이 기다려지긴 했지만, 한 가지 불편하고 유쾌하지 않은 일이 있다면 까다로운 보안검사를 받는 일이었다. 원자력 발전소에서 통용되는 모든 문서와 자료, 기술과 장비들에 대해 보안관리가 철저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건 이해가 되지만, 건설현장을 들어가고 나갈 때마다 신분을 확인하는 것도 모자라 소지품을 일일이 검사받는 건 다소 기분이 상하는 일이었다. 아부다비 시내에서 현장으로 다시 돌아올 때면, 모든 개별 짐을 들고 차량에서 내린 후 검문소 앞에 길게 줄을 서야만 했다. 현지 보안직원은 총을 든 채 신분증과 얼굴을 대조하고, 개개인이 들고 있는 짐들을 하나씩 이리저리 검사했다. 기다란 작대기로 가방 안을 이리저리 휘저었고, 아무런 이상이 없으면 그들은 얼굴도 보지 않고 “Go”라는 한마디를 던졌다. 우리는 그 말에 주섬주섬 짐들을 챙겨 들고 차량에 다시 올라탄 후에야 현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어느덧 낯설음이 익숙함으로 대체되는 시간이 되자, 단조롭고도 획일적인 생활에 대한 마음의 동요가 일었다. 사막에서의 생활은 마치 군대와 같아서,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매일 똑같은 사람들과 함께 똑같은 음식을 먹어야만 했다. 이러다간 각자의 생각마저 로봇처럼 모두 똑같아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 정도였다. 

풀 한 포기 없이 모래바람이 날리는 뜨거운 사막에서 살아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사방이 울타리로 막혀 있고 오갈 데 없는 그곳에서의 삶이란 정서적으로 메마를 수밖에 없었다. 매일 마주하는 황량하고 삭막한 사막의 풍경은 마음마저 사막을 닮아가게 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러나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힘들었던 본질적인 이유는 사무실 분위기 때문이었다. 당시 내가 근무하는 부서는 모두가 피하는 곳이었는데, 부서장 때문이었다. 성격이 괴팍하고 부하직원들을 함부로 대하기로 유명한 그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사무실에서 마구 서류를 집어 던지고 분을 삭이지 못했다. 퇴근 전 업무를 지시하고 나면 다음 날 출근하기 전까지 보고서를 그의 책상에 올려놓아야만 했고, 그렇지 않으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야단과 질책 수준이 아니라, 여러 사람 앞에서 모멸감과 수치심을 주었다. 주말 전날 그런 지시를 받기라도 하면, 주말에 아부다비 시내도 올라가지 못하고 현장에 머물러야만 할 때도 있었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다 보니, 부서원 모두는 항상 긴장한 채 어떻게 하면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날이 갈수록 나 또한 그런 분위기 속에서 버틸 자신이 점점 없어졌다.    


사무실 분위기로 인해 마음이 답답하고 지칠 때면 나는 어김없이 사무실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곳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나만의 아지트였고, 유일한 안식과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옥상 출입문의 손잡이에는 출입금지를 뜻하는 ‘No Entry’라는 작은 푯말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손잡이를 오른쪽으로 두 번 돌리면 문이 열렸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치 비밀의 정원에 들어가는 것처럼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그곳에서 보이는 탁 트인 전망은 고층 건물의 루프 탑 카페가 남부럽지 않았다. 그곳은 제법 바람이 불었고, 그 바람에 맞춰 심호흡을 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면 이내 마음이 진정되었다. 고개를 들면 건설공사 현장이 한 눈에 들어왔고, 그 뒤로 황토 빛 사막 끝머리에 있는 바다가 보였다. 그 바다를 한참 동안 보고 있으면 마치 내가 지금 그곳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날도 가슴이 무너진 날이었다. ‘No Entry’가 적힌 푯말을 무심히 지나쳐 옥상으로 올라가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출입금지란 말은 입구는 있지만 들어와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그 말은 당연히 출구도 없다는 뜻이다. 일단 사막에 들어오고 나면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고, 돌아갈 수도 없는 내 모습과 어쩐지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색 유리병 안의 모래시계에는 내게 허락된 사막의 시간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을 때였다.  

  


'달리는 낙타는 사막을 건너지 못한다'가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브런치와 제 글을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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